본문 바로가기

ⓤ 오늘의 양식

2014년 4월 25일 금요일 - '바른 열심 vs 잘못된 열심'

v.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v.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v.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v.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질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v.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갈라디아서 (Galatians) 4장14-18절
 
'영적인 분별력을 갖게 하는 복음'
 
오늘 QT 본문은 갈라디아서 4:12-20절 말씀입니다.
12-15절은 복음으로 인해 사랑을 나누는 성도에 대하여
16-18절은 복음으로 인해 영적 분별력을 갖게 됨에 대하여
19-20절은 복음으로 인해 성숙한 성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후
다시 유대인들이 전한 율법주의로 돌아간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그들이 바울로부터 처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때를 회상시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바울은 건강한 몸이 아니었습니다.
질병을 갖고 있었는데 그 질병은 아마도 고치지 못하는 병으로 봅니다.
이 질병은 고린도후서 12:7절에서 언급된 '육체의 가시'라고 봅니다.
15절의 눈이라도 빼주었을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눈병 즉 안질이라고도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런에 이 질병이 바울의 대적자들인 유대교인들에게는 공격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아픔에 대해 위로하거나 낫기를 기원한 것이 아니라
그 불치의 병이 바로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공격의 근거가 바로 신명기 28:15-68절에 나오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가 받을 저주에 대한 말씀입니다.
거기에 치유 받지 못하는 질병이 있는데 바울이 바로 그런 케이스라는 겁니다.
 
그럴 때 갈라디아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유대인들이 전하는 유대교를 믿을 것인지.
그런 기로에서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고치지 못하는 질병을 가진 바울을 업신여기지도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이 천사로 더 나아가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을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인해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랬던 그들이 바울이 떠난 후에 다시 들어온 유대교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들이 보여준 열심을 믿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떠났습니다.
다시 율법으로 돌아갔고 심지어 할례도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바울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바울은 그 이유 중에 하나로 그들의 잘못된, 위선적인 열심을 꼽았습니다.
분명이 가만히 들어온 유대교 사람들은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여준 열심은 위장된 열심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바로 갈라디아 교인들과 바울 사이를 이간질 시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열심은 바울에게 대해서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든 좋은 것이지만
잘못된 열심은 사람 사이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바로 교회를 흔드는 유대교 사람들이 그런 잘못된 열심을 낸 경우입니다.
 
사도 바울도 한 때는 잘못된 열심으로 인해
멀리 외국까지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잡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나니아로부터 안수를 받을 때에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영적인 분별력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잘못된 길을 왔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늘 교회 안에서도 잘못된 열심, 위선적인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열심의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빚진 자로, 말씀에 순종하는 의미로 섬기는가?
아니면 자신을 높이기 위해, 칭찬받기 위해,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함인가?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열심을 내는 척 합니다.
그리고 목적을 이루고 나면 열심은 없습니다.
알아주지 않으면 열심을 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열심의 정도와 방향을 결정하는 주된 요인은 이익이라고 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하고 이익이 되는 것에는 열심을 내지만
불리하고 손해를 보는 것이라면, 아무런 알아주는 것이 없는 없으면 하지 않거나 그만 둡니다.
심지어 그런 잘못된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험담합니다.
일단 자기 편을 만들 때까지는 열심을 내다가 목적을 이루고 나면 열심내지 않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베푼 것을 빌미로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합니다.
이런 것을 분별하는 영적인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에 바로서면, 영적인 눈이 열려서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묵상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무엇으로 평가하는가?
불편하거나 외적인 것으로 쉽게 비하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차별하는 것은 없는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떤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셨는지를 생각해 보았는가?
오히려 불편하여 연약한 사람들에 대해 더 베풀고 섬겨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무엇에 열심을 내고 있는가?
좋은 것인가?
좋은 동기에서 시작되었는가?
혹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들이 보는데서만 열심을 내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열심을 빌미로 자기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없는가?
열심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이 있는가?
열심으로 인해 도전과 감동을 주고 헌신케 된 사람이 있는가?
열심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가 아니면 반짝하고 만 것인가?
말씀을 가르쳐 본 적이 있는가?
복음으로 예수님께로 인도한 사람이 있는가?
자신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은 후, 말씀으로 양육받은 적이 있는가?
자신이 지금 예수님의 제자라고 보는가?
자신의 믿음이 지금 본이 되고, 가르칠 정도로 성숙하다고 보는가?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가?
틀린 것을 알면서도,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이익 때문에, 손해가 두려워 따라가는 것은 없는가?
진리가 아니고 진실이 아니라면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바로 잡겠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날에도 교회 안과 밖에서 위선적인 열심을 내면서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 시키고, 진리를 혼미케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영적인 분별력을 구하고 얻어 미혹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낮은 자세로 연약한 자들을 진정으로 섬기는 성숙된 믿음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