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v.2 그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v.3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v.4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v.5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사무엘상 (1 Samuel) 18장1-5절
'요나단의 모습인가 사울의 모습인가?'
오늘 QT 본문은 사무엘상 18장1-9절 말씀입니다.
1-4절은 요나단과 다윗의 아름다운 우정에 대하여
5절은 사울에 의해 군대 장으로 세움을 받는 다윗에 대하여
6-9절은 다윗의 승리로 인한 백성들의 반응과 사울의 반응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름다운 모습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입니다.
이 둘의 신분을 비교해보면 너무 다릅니다.
요나단은 왕자이고 다윗은 목동입니다.
신분상으로는 도저히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생명을 줄 정도의 아름다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하나가 되게 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늘 하나님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그 믿음이 그들을 하나가 되게 했습니다.
그 두 사람의 공통점은 바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겼다는 겁니다.
그들이 전쟁에서 이긴 것은 그들이 용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숫자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갔기 때문에 승리했습니다.
14:6절에는 요나단의 믿음이 17:36-37절에서는 다윗의 믿음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당당히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런 믿음이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아름다운 친구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요나단은 왕자로서 신분을 상징하는 옷과 칼까지도 그에게 주었습니다.
다윗은 양을 치다가 아버지의 부름으로 형들을 보러 왔다가
골리앗을 죽임으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왕이 거하는 곳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옷도 변변치 않았을 것이고 더욱이 무기도 없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요나단은 비쌀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목숨을 지키는 칼까지도 그에게 주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요나단이 다윗을 차기 왕으로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반면 사울은 다윗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처음에는 다윗이 자기의 머리를 맑게 해주고
골치 아픈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에 큰 승리를 안겨 주었으니
꼭 필요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가는 곳마다 이겼으니 쓸만한 부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를 군대 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기고 돌아올 때 여인들이 부르는 노래가사를 듣고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무엇이라고 노래했는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사울은 수천 명이요 다윗은 수만 명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에 사울은 시기가 생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백성으로부터 인기를 얻은 다윗이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결국 사울은 다윗을 왕권에 대한 도전자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을 주목했습니다.
여기서 다윗을 주목했다는 말은 좋지 않은 의미입니다.
질투심으로 쳐다보았다.
시기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악한 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아들 요나단은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친구로 여긴 반면
아버지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며 왕권을 빼앗는 자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와 같은 사람들 있는 반면
다윗과 사울의 관계와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진 자, 있는 자끼리만 교제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교제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누가 잘 되면 칭찬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배가 아파서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뒤에서 수군거리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막는 사람들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한 마음이 되어 사랑하게 묶은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좋은 친구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나눌 때 이루어집니다.
서로를 신뢰하고 기도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마음의 문이 점점 열리게 되고 만날수록 관계도 깊어집니다.
반면 세상 친구는, 술 친구는 그저 먹고 마시고 세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기에
언젠가는 틀어집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
한 쪽이 승진하거나 출세하거나 혹은 한 쪽이 망하거나 할 때입니다.
승진하면 배가 아파서, 망하면 손해볼까봐 만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왕족이나 귀족이나 부자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시골에서 자라셨습니다.
사역을 하신 이후로는 죄인들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약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죄인의 친구'라고 기득권자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비웃음을 당할 정도로
약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다가가 귀한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권력이든 돈이든 가진 사람들과 줄을 대기 위해 애씁니다.
먼저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립니다.
주는 자기 아니라 받는 자가 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늘 자신이 중심이 되고자 합니다.
자신은 관심을 받고 칭찬을 받고 높아지려고 하면서 남은 깍아 내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으며 화목함이 있을까요?
묵상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친구가 있는가?
자신의 친구는 어떤 것으로 인해 연결되어 있는가?
세상적인 친구와 믿음의 친구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신뢰하는가?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과 기도를 말하는 친구를 오히려 멀리 하지 않는가?
친구를 혹은 사람을 만나면 대화의 주제가 무엇인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세상인가?
주변 사람이 자기보다 잘 될 때 기뻐하는가 아니면 배 아파 하는가?
교회의 모습이 어떻다고 여기는가?
초대 예루살렘교회나 바울을 파송한 안디옥교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아는가?
바울이 빌레몬과 오네시모에게 권면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신분과 외모와 나이에 상관없이 진정으로 사귈 수 있는가?
공과 사,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별하는가?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따라가는가?
늘 자기 머리를, 능력을 믿고 사는 것은 아닌가?
자신이 좋은 친구가 되고자 하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이 교회 안에서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보고
상대방의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중심과 믿음을 보고
진정한 친구요 동역자로 먼저 다가가 나누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