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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4년 9월 17일 수요일 - '하나님 나라를 이어가기 위해 희생을 감수한 사람들'

v.68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집을 그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기쁘게 드리되
v.69 힘 자라는 대로 공사하는 금고에 들이니
       금이 육만 천 다락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백 벌이었더라.
v.70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 몇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고
       이스라엘 무리도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라.
                                                            에스라 (Ezra) 2장68-70절
 
'하나님 나라를 이어가기 위해 희생을 감수한 사람들'
 
오늘 QT 본문은 에스라 2:43-70절 말씀입니다.
43-58절은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사람들에 대하여
59-63절은 계보를 밝힐 수 없는 사람들 (제사장)에 대하여
64-70절은 성전 건축을 위해 기쁨으로 예물을 드린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 중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들입니다.
느디님 사람들은 여호수아 9장의 기브온 사람들과 연결시켜
이스라엘의 노예로 간주되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이 성전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부류는 솔로몬의 신하로 표현된 사람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강제 노역에 동원된 이방 사람들의 후손들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이 가나안 땅에 살았거나 이스라엘의 대적들로
전쟁에 패한 후 노역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남 유다가 바벨론에 망해 포로로 잡혀갈 때 함께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귀환할 때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신분적으로 볼 때 이방인들로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이었습니다.
남 유다에 살 때는 유대인들의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후에는 외국 땅이기에
어느 정도 동등한 위치에 살았을 것으로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레스 칙령 때 유대인들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지을 때와 성전 벽을 재건할 때 (느헤미야 때) 자원해서 섬겼습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돌아온 백성들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바벨론에 있었을 때에는 제사장이었지만
돌아와서는 제사장직분을 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선조가 정말 이스라엘 사람인지조차 불분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족보가 불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바벨론에서는 제사장이요 이스라엘 사람이었지만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후에는 신분이 불분명하기에
전과 같은 직분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재미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족보가
신분을 밝혀주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족보를 따지는 것은 포로로 돌아온 이후
그들 공동체에서 이방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직분이 있었던 사람들이 더 구별된 삶을 살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총 숫자가 49,897명이지만
(42,360 + 7,337 + 200/ 64-65절)
실제로 기록된 사람들의 총 숫자를 더하면 29,818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기록된 사람들이 남자만 계수가 되고
나머지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 그리고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아닌 사람들은
포함이 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바로 성전을 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황무하고 황폐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자신들이 살 집과 기반을 위해 일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정착금이나 지원금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원하며 기쁨으로 성전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바로 이런 헌신된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를 이어간 선구자들이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 남았습니다.
포로로 잡혀 간 이후 3-4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히브리어를 못하는 사람들도 생겼을 것이고
조국이 어딘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고향은 바로 바벨론입니다.
그들은 황폐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보다는
이미 기반을 잡은, 그곳에서 편하게 안주한 사람들로
후에 디아스포로 유대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됨을 알고 조국으로 돌아온 소수의 사람들.
느혜미야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예루살렘은 황폐하였고
심지어 성벽도 없어서 보호받을 것도 없었고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사람들로 인해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는 것이 힘들다고 더 나은 곳을 향해 이민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에 온 그런 사람들은 american dream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에서 차별을 받으며 고생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처음 올 때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정말 꿈을 이루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가졌던 꿈은 다시 성전을 세우고 나라를 바르게 하는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기반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고
고생도 감수할 각오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자기 기반이 아니라 성전 건축에 귀한 예물을 기쁨으로 드렸습니다.
 
묵상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차별은 없는가?
학벌로, 세상적인 위치로, 가진 것으로 차별하는 것은 없는가?
세상의 위치가 믿음과 관계 없이 교회의 위치가 되는 것은 없는가?
왜 오늘날 교회가 끼리끼리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보는가?
하나님 나라의 리더로서 바른 검증이 되고 있는가?
제대로 훈련받고, 말씀과 기도 생활에 힘쓰고, 본이 되는 사람인지 검증하는가?
신분이 불투명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친분으로 세우는 경우는 없는가?
하나님 나라 일꾼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유효한가?
믿음생활에 있어서 바른 예물 생활을 하는가?
하나님께 드림에 있어서 기쁨으로 자원해서 드리는가?
자신을 위함과 하나님 나라를 위함을 비교할 때 어느 것이 더 풍성한가?
섬김이 기쁨이 되는가 아니면 일이요 부담이요 더 나아가 시험거리로 여기지는 않는가?
만약 기쁨이 아니라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모습을 돌아보고
그 가운데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자세로 임하는지 점검하고
복음 안에서 차별이 없이, 아름답게 기쁨으로 동역하는 교회를 만드는데
앞장서는 하나님 나라 일꾼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