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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4년 9월 19일 금요일 - '손을 약하게 하는 사람들'

v.1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v.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v.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추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v.4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v.5 뱌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v.6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에스라 (Ezra) 4장1-6절
 
'손을 약하게 하는 사람들'
 
오늘 QT 본문은 에스라 4:1-10절 말씀입니다.
1-3절은 성전 건축에 동참하려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거부하는 유다 백성들에 대하여
4-5절은 성전 건축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하여
6-10절은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사람들에 동조하는 세력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 뒤에는 항상 좋지 않은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번제단을 세우고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기쁨의 소식에 대해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은 그럴듯하게 하며 다가와서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오기 전에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앗수르의 정책으로 이방 사람들과 섞인 사마리아 사람들과
다른 나라에서 강제로 이주해 와서 살고 있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앗수르 왕 에살핫돈 시대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BC 721년에 앗수르 왕 사르곤 2세 때에 망했고
그들의 정책에 따라 다른 지역으로 옮겨져서 혼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 나라 사람들이 북 이스라엘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만 섬긴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방 사람들과 섞였기에 이방 사람들이 믿는 신들도 섬기고
동시에 하나님도 섬겼던 혼합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을 리더들이 알았기 때문에 그들이 도와주겠다고 했을 때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리더들이 그들의 동참을 거절한 순간부터
그들은 노골적으로 성전 건축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협박하면서 계속해서 그들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었습니다.
결국 주변 모두가 반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왜 그들이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것을 방해하는가?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습니다.
돌아온 사람들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의 역사로 그들이 부흥하게 되고 부강하게 될 것을 압니다.
그러면 결국 자신들의 기득권이 약해지는 것이고
자신들에게 어떤 모양이든 불리하게 될 것을 알기에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 건축도 방해를 했지만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70-80년 후에 있을 성전 벽 재건도 방해를 했습니다.
그 때가 바로 에스라, 느혜미야가 활동하던, 아하수에로 왕과 아닥사스다 왕 때입니다.
처음에는 가까운 사람들이 연합해서 방해을 했지만
그들은 더욱 범위를 넓혀서 어떤 모양이든 연관된 사람들을 다 끌어들여
적극적으로 방해했습니다.
 
마귀의 방해는 항상 있습니다.
죄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두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마귀의 입장에서 보면
위험 인물이기에 그냥 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너뜨리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강하게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공격합니다.
열심을 내는 사람에게는 교만케 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는 낙담케 하여 믿음에서 떠나도록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경계해야 하는지
어떤 상황을 경계해야 하는지 깨어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늘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와 상관이 없는 사람들, 멀리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도 못합니다.
 
우리 자신이 어떤 경우에 가장 낙심이 됩니까?
몇 마디 말에 낙심이 되지 않습니까?
앞에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뒤에서 수군거리고
근거도 없는 말을 하면서 깍아내리는 말로 인해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왜 자신이 이런 말을 들어면서까지 헌신하고 섬겨야 하는지
화가 나고 낙심이 됩니다.
그러면 마귀가 성공한 것입니다.
 
사회는 경쟁이 치열합니다.
자신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깎아 내려야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는 웃으면서 좋은 말을 하지만
돌아서면 비방하고 헐뜯고 좋지 않은 음해성 말들을 합니다.
잘 모르는 상황이라면 그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100%는 아닐지라도
일단 의심하고 편견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반복되면 결국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되고 분열되게 됩니다.
그것이 창세 이후, 지금까지 마귀가 쓰고 있는 계략입니다.
 
마귀는 절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거나 더 열심을 내는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마귀는 예수님도 시험했습니다.
그것도 육체적으로 가장 약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 때가 영적으로 가장 강할 때, 즉 성령충만한 때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패했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떠난 것은 아니고 잠시 떠났습니다.
그리고 늘 주변을 맴돌고 있다가 기회가 되면 누구든 유혹했습니다.
거기에 베드로가 있었고, 가룟 유다가 있었고, 남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까지도 마귀가 시험을 했다면 누구든 예외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믿음의 열심을 내면 낼수록 마귀의 방해는 비례하여 커집니다.
더 교묘해지고, 더 강해지고, 더 집요합니다.
그래서 열심을 낼수록 믿음의 사람들은 더 영적으로 무장하고 싸워야 합니다.
시선이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과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던 일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열심을 내야 합니다.
만약 시험이든 핍박으로 인해 하던 일을 멈춘다면
우리는 패하고 마귀는 승리한 것입니다.
전신갑주를 입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묵상
어떤 사람을 경계해야 하는가?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저 좋은게 좋은 것이고 적당히 하자고 하는 사람인가?
소리장도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웃음 뒤에 칼을 감추고 있다는 뜻)
오늘날 사회가 그렇지 않는가? 앞에서는 웃지만 돌아서면 비판하고 음해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떤 상황이 될 때 가장 위축이 되고 낙심이 되는가?
근거도 없는 말 한 마디에 낙심하여 하던 일을 그만 두는 것은 없는가?
그럴듯한 말에 넘어가서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은 없는가?
어떤 마귀의 계략에 자신이 가장 약한지 아는가?
핍박이나 고난인가 아니면 달콤함에 약한가?
잘 안 풀린다고 실망하는 것은 없는가?
잘 된다고 교만한 것은 없는가?
힘들 때마다 주님과 십자가를 바라보는가?
마귀와의 영적전쟁에 대비하여 늘 전신갑주를 입고 무시로 기도하며 준비하는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영분별력도 생기고 권능도 덧입어서 대처하고 이길 수 있음을 경험했는가?
바른 길이 아니라고 여길 때 단호하게 거절하는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 마귀의 시험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없는가?
우연은 없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시험과 고난이 없는 신앙생활은 없으며
늘 마귀가 호시탐탐 노려 손을 약하게 함을 알고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고 낙심하거나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주님과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마귀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싸우며 계속하여 믿음의 길을 가는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