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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3년 10월 30일 수요일 - '스승인가 아버지인가?'

v.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v.15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v.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v.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v.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v.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v.20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v.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고린도전서 (1 Corinthinas) 4장14-21절
 
'스승인가 아버지인가?'
 
오늘 QT 본문은 고린도전서 4:9-21절 말씀입니다.
9-13절은 복음을 전하다가 세상의 구경거리와 고생을 한 바울에 대한 말씀이고
14-17절은 영적인 아버지로서 성도들을 권면하는 바울에 대한 말씀이고
18-21절은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언젠가 만나 그들의 능력을 보겠다는 바울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파를 만들고 어지럽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사도로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게 합니다.
1. 사도로 부름받았지만 수많은 고난을 받았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입을 옷도 제대로 없었고, 매도 맞았으며, 거할 곳도 없었고
경제적으로 어려워 직접 힘든 일을 했으며, 박대도 받았고, 쓰레기 취급도 받았지만
때로는 그런 고난이 어찌나 심했던지 죽을 지경까지 갔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그런 고난을 받아야만 했는가?
왜 그런 고난을 참아야만 했는가?
그 이유는 한 가지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그런 모든 수고와 어려움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참고 견뎠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난과 고통을 알지 못하는 너희들은
자기들이 잘나서 구원을 얻은 줄로 알고, 자기만 잘난 줄로 알고
파를 만들고 다른 지체들을 비판하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으로 과거를 말했습니다.
 
2. 스승이 아니라 영적인 아버지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자신이 사도로서 걸어온 길을 이야기 한 것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는 아님을 바울은 강조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자녀같이 여긴다고 고백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
영적인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스승과 아버지의 차이는 무엇인가?
스승은 학생들을 가르치기만 하면 됩니다.
가르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안 하고는 스승의 책임이 아니라 학생 책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르친 다음, 자녀들이 잘못하면 그들 책임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말로, 때로는 매로 그들이 바른 길로 가도록 합니다.
책임을 지고 알고 바뀌도록 합니다.
그것이 바로 스승과 아비의 차이입니다.
 
만약 바울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라 스승의 마음이었다면
그것은 바울의 책임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이기에 그냥 내버려두어도 그만 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영적인 아버지이기에 그들이 잘못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권면도 하고, 책망하기도 한 겁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어떻게 보면 교만한 말 같고, 자신은 완전한 사람처럼 여겨지는 말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애쓰는 만큼
그들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자는 진심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지금 교회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교만한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능력을 점검해 보겠다.
 
그 교만한 사람들 중에 이런 말을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떠났으니 다시 볼 일도 없을거라며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울파라고 하는 사람들을 거침없이 비판했습니다.
그런 그들에 대해 언젠가 다시 보면 그들이 말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확인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남을 비판하며 말은 잘하지만
과연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영적인 삶인지 확인해 보겠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고
권위만 내새우며 큰 소리 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 삶에는 변화가 없고, 성령의 역사도 경험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믿게 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도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런 부족함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알지 못하면 교만하게 됩니다.
부족한 사람들에 대해 긍휼히 여기지 못하고 정죄하고 비판하게 됩니다.
그러니 은혜가 없는 곳에는 시기와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자신이 죄인에서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이 자신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할 때 자신의 죄도 용서받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고통 가운데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스승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묵상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 더 큰 어려움이 있음을 아는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늘 인식하는가?
오히려 예수님을 믿어 마귀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늘 마귀의 표적이 됨을 아는가?
그래서 영적으로 무장을 하고 싸워야 하는 존재임을 아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그런 자리에까지 나아가겠는가?
좋은 일과 복을 기대했는데 반대가 된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녀인가?
자신이 방황하고 불순종할 때 부모님은 어떻게 대하셨는가?
버림받았는가 아니면 사랑으로 또 다른 기회를 얻었는가?
고난을 받을 때 주 예수님이 생각나는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죄인을 위해 그 고통과 수치를 받으시고 대신 죽으심을 아는가?
고난 중에 눈을 들어 예수님과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가?
자신이 복음을 전하고 받아들인 사람이 있는가?
만약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상대방의 마음이 워낙 닫힌 것도 있겠지만 혹시 자신의 삶이 본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는 않는가?
신앙의 형식은 갖추어,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도 읽지만 성령 체험이 없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삶에 변화가 없다면 왜 그런지 생각해 보았는가?
말은 그럴듯하게 하는데 행함이 없는 것은 아닌가?
사도 야보보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게 비판적이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그렇게 관대하지 않는가?
영적인 자녀나 영적인 멘토가 있는가?
자신은 교회의 믿을만한 일꾼이라고 여기는가?
자신은 교회의 영적인 본이 되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육신의 부모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십자가를 통해 용서받고 얻은 새로운 생명을 성령의 능력으로 보이고 나눔으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위로하여 화목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얻는 기쁨의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