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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3년 10월 18일 금요일 - '반복되는 실수와 후회'

v.9 백성을 계수할 때에 야베스 길르앗 주민이 하나도 거기 없음을 보았음이라.
v.10 회중이 큰 용사 만 이천 명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주민과 부녀와 어린아이를 칼날로 치라.
v.11 너희가 행할 일은 모든 남자와 및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여
       바칠 것이니라 하였더라.
v.12 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주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 명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동침한 일이 없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을 실로 진영으로 데려오니 이곳은 가나안 땅이더라.
v.13 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v.14 그 때에 베냐민이 돌아온지라. 이에 이스라엘 사람이 야베스 길르앗 여자들 중에서
       살려 둔 여자들을 그들에게 주었으니 아직도 부족하므로
v.15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
                                                                                사사기 (Judges) 21장9-15절
 
'반복되는 실수와 후회'
 
오늘 QT 말씀은 사사기 21:1-15절 말씀입니다.
1-5절은 베냐민 지파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슬퍼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이고
6-12절은 총회에 참석하지 아니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진멸하는 말씀이고
13-15절은 베냐민 지파의 남은 사람들과 평화를 선언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말씀입니다.
 
한 레위인의 첩이 죽은 것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지파들 간의 싸움은 일단락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승리를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싸움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11지파 사람들은 오히려 걱정에 싸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한 맹세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11 지파 사람들은 베냐민 지파와의 싸움을 앞두고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두 가지 맹세를 했습니다.
1.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악하니까 딸을 그들에게 주지 말자는 것이고
2. 총회로 모일 때 오지 않는 사람들은 반드시 죽인다는 겁니다.
 
딸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원수처럼 여긴다는 말입니다.
 
이 맹세는 보기에는 좋은 것처럼, 합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맹세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 스스로 맹세를 해놓고 그 맹세에 자신들이 올무에 빠졌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뉘우치고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대로 고하고
하나님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 다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또 다시 스스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총회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그렇다고 다 죽이면 그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그들이 한 맹세가 과연 옳습니까?
 
그들은 베냐민을 자기 형제로 말은 하면서도 막상 싸움이 나자 끝까지 쫓아가서 죽였습니다.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도 애들까지 포함하여 다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베냐민 지파의 남은 600명을 기억하고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는 남겨두었습니다.
 
그들이 내린 맹세와 결정은 전부 자기 주관대로 한 것이지 하나님과 무관합니다.
그들은 한 번도 하나님께 제대로 물은 적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 묻지 않았을까?
어떻게 보면 이것이 사사시대의 중요한 이슈라고 여겨집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는 바로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사사기에는 제사장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는 잘못된 레위 사람 즉 잘못된 제사장에 대한 것입니다.
죄에 대해 속죄제나 속건제를 드리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말씀을 받은 것도, 말씀을 올려드린 것도 없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말씀도 없습니다.
오히려 제사장이 돈에 팔리고, 첩을 두는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영적으로 타락하지 자연적으로 도덕적인 타락이 따라왔습니다.
리더가 바로 서지 못하니까 온 백성도 자기 편한대로 지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정한 회개는 없었고 후회만 있습니다.
그러니 또 다시 경솔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잘못되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이 자신들이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잘못된 것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그런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후회는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중에 그들이 그나마 잘 한 것이 있다면
베냐민 지파의 남은 사람들과 화평한 겁니다.
그들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필요를 채워준 겁니다.
 
이스라엘 11지파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
하나님께 물음도 없이 스스로 결정하는 모습은 오늘날 종교행위와 같습니다.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 생활을 잘 하고
봉사도 꾸준히 했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누구의 기준에서 보는가 입니다.
물론 형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형식만으로 참된 신앙인의 척도가 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에 기록된 대로 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의 속은 회칠한 무덤처럼 위선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보시고 그들을 위선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진정으로 믿음의 사람이라면
어떤 일을 하든 가장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 스스로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삶은 실수를 반복하고 그 때마다 후회할 뿐입니다.
 
후회와 회개는 다릅니다.
후회는 단순한 감정의 표현입니다.
잘못했다, 안타깝다,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등등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는 행위의 열매가 따릅니다.
그저행함이 없는 말뿐인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가 없으니 삶에 돌이킴도 없고 여전히 실수하고 후회가 반복될 뿐입니다.
 
그리고 맹세는 쉽게 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묻고 뜻에 따를 것이지 즉흥적으로 하는 자기의 결정은 위험합니다.
특히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하는 맹세라면 더더욱 피해야 합니다.
이번 위기만 잘 넘어가게 하시면,
이번 로토에 당첨만 되게 하시면,
이번 수능에 자녀가 좋은 점수 받게 하시면,
이번 인사에서 승진만 하게 하시면
암에서 낫게 하시면,
건강에서 회복되게 하시면.
이런 모든 것은 잘못된 맹세로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
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위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면 주시지 않으십니다.
 
묵상
어떤 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가?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없는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기꺼이 순종하는가?
후회와 회개의 차이를 알고 행하는가?
똑 같은 후회를 반복하지는 않는가?
맹세를 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는가?
급해서 맹세를 하고서 이루어진 다음 그 맹세를 지켰는가?
종교행위와 믿음이 같다고 보는가?
참된 신앙의 모습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외적인 형식은 있는데 내면은 어떤가?
삶에 변화가 있고,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져가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는가?
살면서 생기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형제들과, 교회의 지체들과 화목한가?
원수처럼 여기고 얼굴도 안 보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사는 것인가?
지체의 필요를 아는가?
교회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살아있는 몸인가 아니면 조직인가?
갈등하고 다투었지만 화목함이 있는가?
마음에 평안함이 있는가?
평안함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평화인가 아니면 다른 것으로 인한 평화인가?
자신이 왕 같은 제사장인데, 제사장으로서 바른 삶을 사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떤 일이든 가장 먼저 하나님께 물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진정한 평화를 누릴 뿐만 아니라
이웃과도 화해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