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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3년 5월 1일 수요일 - '거짓 교훈 vs 바른 교훈'

v.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v.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v.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v.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v.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v.8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v.9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하는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v.10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v.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디모데전서 (1 Timothy) 1장3-11절
 
'거짓 교훈 vs 바른 교훈'
 
오늘 QT 말씀은 디모데전서 1:1-11절 말씀입니다.
 
1-2절은 문안인사로 보내는 자와 받는 자 그리고 기원에 대한 말씀이고
3-7절은 경계해야 할 거짓 가르침에 대한 말씀이고
8-11절은 좇아야 할 바른 교훈에 대한 말씀입니다.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그리고 디도서를 목회서신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회자에게 교회를 어떻게 돌볼 것인지에 대해
교훈을 주는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와 디도서 그리고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의 말기에 쓰여진 편지들입니다.
사도행전 제일 마지막 장인 28장에 기록된 것처럼 바울은 2년 동안 셋집에서 포로로 있었습니다.
사람을 만날 수도 없는 추운 지하감옥이 아니라 자유로운 셋집에서 비록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어느 정도 자유도 있었고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고 복음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 기간이 AD 61-63년으로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때문에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받는 도중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밝혔기에 로마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에 포로된 몸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2년이 지났을 때 그에 대한 고소가 취소되었기에 그를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 후 바울은 에베소를 방문하였고 거기에 교회를 감독하지 위해 디모데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마게도냐 지방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디모데전서를 썼다고 봅니다. (어딘지 정확하게 모르지만 빌립보라고도 함)
그러니까 이 편지를 쓴 시기는 63년 이후로 봅니다.
 
이 편지를 쓴 목적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가 무거운 목회의 책임을 수행함에 있어
길잡이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디모데전서에는 거짓 교훈에 대한 말씀과 일꾼을 세우는 기준과 책임에 대한 말씀 등
목회에 필요한 여러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복음 안에서 아버지와 자녀와 같은 관계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제 1차 전도 여행 때 전했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2차 전도 여행 때부터는 동행하게 되었고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낳은 아들로 여겼습니다.
 
바울이 가장 먼저 주의를 주는 것은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이 거짓 교훈은 영지주의적인 것으로 신화나 신들 (우상)의 계보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적인 지식과 자기 자랑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그런 지식 조차 가르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는 말조차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가르치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바울과 같은 대가가 보기에는 아마추어 수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쓸데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과 변론을 피하라는 겁니다.
 
반면 바른 교훈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교훈입니다.
이 사랑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의 육체적이고 주관적인 사랑이 아니라
조건이 없는, 희생적인 아가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교훈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훈은 헛된 세상 자랑과 우상과 같은 것으로 변론만 생기지만
바른 교훈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자신을 돌아보아 새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그 바른 교훈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훈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부인합니다.
왜 부인하는가?
죄를 안 지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좀 더 낫다는 의미입니다.
좀 더 많이 알고, 좀 더 많이 가졌고, 좀 더 도덕적으로 낫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낫다고 죄인이 아닙니까?
죄인은 죄인입니다.
 
그 죄를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의 가장 큰 목적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겁니다. (로마서 3:20절)
율법이 있기 전에는 그저 자신이 생각하기에 편한 대로 살았습니다.
마치 사사시대와 같이 자기 주관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혼탁하고 불안한 세상이었습니까!
황야의 무법자와 같이 살벌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에 법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해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 선함에도 불구하고 그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는 인간의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을 어긴 죄로 인해 심판이 불가피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긍휼을 베푸신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동등하게 주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바른 교훈인 복음입니다.
 
모여서 쓸데 없이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자기 자랑을 하는 곳에는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교하고, 비판하고, 시기와 질투가 있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점점 불안해지고.
비교하기 때문에 미움이 있고 다툼도 있고 파벌도 있고.
자기가 최고인 것처럼 교만도 있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우습게 보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는 영광의 복음입니다.
 
묵상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가?
법을 다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법을 어겼지만 들키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가?
사람은 모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모르신다고 여기는가?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임을,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함을 아는가?
은혜와 평강을 어떻게 얻는가?
무엇을 성취함으로, 돈을 벌고 출세함으로, 최고의 학벌을 가짐으로?
오히려 그런 것을 가질수록 더 추악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는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죄임을 아는가?
모두가 죄인이라면 무엇이 필요한가?
죄의 대가는 치러야 하는데, 그게 하나님의 심판인데, 그것을 용서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가?
그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그 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밖에 없는 사실을 아는가?
말씀을 대할 때 자신의 죄를 보는가?
해도 해도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는가?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는가?
소망이 있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 그것이 헛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아
세상이 줄 수 없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새로운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