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v.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v.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v.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v.7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창세기 (Genesis) 49장3-7절
'죽어야 되는데......'
오늘 QT 본문은 창세기 49:1-7절
말씀입니다.
1-2절은 유언을 하기 위해 아들들을 불러모은 야곱에 대한 말씀이고
3-4절은 장자 르우벤에 대한 유언의 말씀이고
5-7절은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유언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49장 한 장은 야곱의 유언에 대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아들 하나 하나를 언급하며 그들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그 내용을 보면 미래적이지만 거기에는 과거와 현재의 일들이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토대로 예언적인 유언이 남겨집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이것은 결코 야곱 개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깁니다.
언젠가 사람은 다
죽습니다.
자신이 죽을 때를 알면 좋겠지만 모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때가 가까워올 때 자녀들 하나 하나에게 복을 빌어주는 준비된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갑자기, 남길 말도 없이 부름을 받는다면 너무 아쉽지 않습니까?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영적인 가장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의 유언에 대한 말씀에서 몇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 욕정 (정욕)을 다스려야
한다.
르우벤은 장자요 여러 면에서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의 침상을 더렵혔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는
말입니다.
차마 꺼내고 싶지 않은 과거를 야곱은 말합니다.
장남이 자기 처와 (비록 종 출신이지만)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충격이었을
겁니다.
얼마나 분노가 생겼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거기에 대해 어떤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잊은 것도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잊고 싶은 과거를 이야기 하면서 그의 모든 탁월이 박탈될 것을
말합니다.
그 결과 그는 장자권을 요셉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 요단 동편에 남게 됩니다.
비록 요단을 건너 이스라엘이 정착할 때까지 남자들은 가서 전쟁을
하지만
돌아와서 요단 동편에 거합니다.
거기서부터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점점 잊혀지는 존재가 됩니다.
사사기에 가면 (삿 5장) 드보라가 르우벤에 대해 비판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점점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바로 육체의 정욕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정욕은
본능입니다.
그러나 본능이라고 해서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늘날 많은 능력과 업적과 성취와 인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욕을 다스리지 못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이 자주 있습니다.
이런 화는 반드시 돈이 많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는 사람들 또한 그 정욕 때문에 성폭행을 하게 됩니다.
연예인들의 스캔들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이길 수 없다면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둘째, 분노를 다스려야
한다.
시므온와 레위는 레아의 후손들입니다.
분명히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형제라고 한 것은 그들이 연합했다는
겁니다.
언제 그들이
연합했는가?
바로 그들의 자매였던 디나가 세겜의 족장 아들에게 성폭력을 당했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그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잔인하게 세겜 사람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 학살의 주모자가 바로 시므온과 레위입니다.
그들이 그 학살에 한 마음이 되었다는 겁니다.
야곱은 그것도 기억하고 그대로 유언을 합니다.
야곱의 유언은 그들을 저주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아들들에게 저주할 수 있는가?
바로 이런 면에서 야곱의 유언은 개인적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으로
봅니다.
그 저주는 이스라엘에서 흩어지는 겁니다.
실제로 시므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유다 지파에게 흡수가 됩니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이 기업이기에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제물을 통해 받는 동물들을 관리할 수 있도록 48개 성읍을
받았는데
그들은 그 48개 성읍으로 흩어졌습니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분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죄가 되면 안 된다고
바울도 선언했습니다. (엡 4:26-27절)
분노가 죄가 된다는 말은 그 다음 날까지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겁니다.
그 날 풀어야 하는데 품고 있으면 그것이 자라서 결국 보복하게
됩니다.
그러면 죄를 범하게 됩니다.
마귀에게 틈을 준다는 말은 마귀가 그런 마음에 쌓아놓은 분노를 부추긴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용서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비겁한 자의 변명이니 갚으라고
부추깁니다.
그것도 받은 것 만큼이 아니라 더 크게 갚으라고
유혹합니다.
결국 분노를 그날 풀지 않고 마음에 가지고 있으면 죄로 나아갑니다.
사도 요한이 미워하는 것은 바로 살인이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폭력을 다스려야
한다.
시므온과 레위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칼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사람의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인간이 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요
불순종입니다.
살인이든, 자살이든 무조건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갚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수를 하나님께 맡겨야
자신이 편합니다.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또한 죄도 범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원수가 자신의 주인이 되지 않게 만드는 겁니다.
눈만 뜨면 그 원수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의 인생 주인이 되는
겁니다.
원수 갚은 것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폭력은 꼭 살인이나 폭력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도
포함이 됩니다.
verbal
abuse.
말도 얼마든지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괴롭히는 말, 인신공격적인 말, 무시하는 말, 저주하는 말.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노엽게 말라는 말이 바로 이 언어 폭력과 관계가
됩니다.
화가 난다고 해서, 자녀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
쓰레기 같은 x
ㅂ ㅅ 같은 x
나가서 죽어버려 등등
이렇게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자신을 쳐서 십자가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절제는 성령 하나님의 열매 가운데 제일 마지막 9번째에 나옵니다.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살아 있는 중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어서 억제가 안 됩니다.
육체의 정욕, 분노, 폭력, 덕이 되지 않는 말.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갚으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즉각 즉각 안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언젠가
하십니다.
자신이 하려고 하면 자신이 시험에 듭니다.
마음의 평안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도록 애써야
합니다.
묵상
육체의 정욕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자연적이라는 변명으로 음란물을 보며, 자신을 더럽히지는 않는가?
피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혼자 있는 것을 피하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거나 운동을 하거나?
더러운 것은 무조건 피하는가?
분노가 생길 때 어떻게 하는가?
바로 화를 내고, 하고 싶은 말을 하거나,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는가?
잠시 그 자리를 피한 적이 있는가?
마음 속으로 1-10까지 세어 본 적이 있는가?
그날 용서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보복하려는 마음으로 품고 있는 것은
없는가?
분노를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이 죄임을 아는가?
죄는 절대로 가만이 있지 않고 자람을 아는가?
마귀에게 기회를 주는 것인줄 아는가?
말을 많이 하면 실수와 허물이 생기는데 말을 절제하는 편인가?
덕이 되지 않는 말을 자주 하지는 않는가?
다른 사람을 웃기기 위해 음담패설과 같은 말을 쉽게 하지 않는가?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노력이 있는가?
인내하며 절제하고자 애씀이 있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아직도 죽지 않아서 다스리지 못하는
감정들을 생각해 보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죽임으로 절제하여 악한 감정들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하고 덕이 되는 승리의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