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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3년 1월 9일 수요일 - '하나님을 떠난 사람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v.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v.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v.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v.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v.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v.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 (Genesis) 4장16-19, 25-26절
 
'하나님을 떠난 사람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오늘 QT 본문은 창세기 4장16-26절 말씀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후 결국 하나님 앞을 떠나 동쪽으로 갑니다.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삶은 어떠한가?
첫째, 세상적인 것에 몰두하게 됩니다.
가인은 자신이 살인자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면 자신에게 보복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담을 쌓고 성을 세웠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사람들과는 담을 쌓습니다.
그런 다음 자녀를 낳아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 갔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결국 세상과 가까와지는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이름을 위해, 자기의 편함을 위해, 자기의 안전을 위해 점점 세상에 몰두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는 완전히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 인생의 결과는 결국 멸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둘째, 더 큰 죄를 범하게 됩니다.
가인의 후손 가운데 라멕 (6대손)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거스려 두 가지를 하게 됩니다.
하나는 아내를 두명 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떠나 연합한다는 일부일처의 원리를 깨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뻔뻔스럽게 부끄러워 하거나 죄책감을 가지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실 것도 선언합니다.
가인 때의 죄가 대를 거듭하면서 점점 보편화되고 사회적으로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을 벌하는 자는 7배의 벌을 받지만 자신을 벌하는 자는 무려 77배나 받는다고 했습니다.
뻔뻔함과 동시에 그만큼 죄가 더 포악해진 것으로 봅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죽인다면 오늘날에는 얼마나 많은 살인이 있겠습니까?
죄가 점점 자라서 점점 더 이기적이고 폭력적이 되는 것을 봅니다.
사도 야보고의 선언처럼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형제간에 살인이 생겼으니 큰 상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하나님 앞을, 그리고 부모 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픔을 아시고 또 다른 자녀를 주셨습니다.
그 자녀의 후손을 통해 처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한 자녀는 하나님을 떠나 세속적이 되었지만 또 한 자녀는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영적인 셋의 계보를 통해 인간은 보존이 되고 먼 훗날 구세주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늘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십니다.
누구라도 죄를 다스리지 못해 범죄할지라도 하나님께 돌아가면 긍휼을 얻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빠지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만큼 세상과는 멀어집니다.
반대로 세상과 가까이 하는 만큼 하나님과는 멀어집니다.
 
묵상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가 아니면 세상을 점점 가까이 가는가?
혹시 더 강해지는, 깊어지는, 죄성은 없는가?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자로 사는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용서받을 수 있음을, 그 분의 긍휼하심을 얻을 수 있음을 기억하는가?
하나님과 담을 쌓는 사람은 이웃과도 담을 쌓게 되는 것을 아는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자기 자신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사회를 위함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기도의 세 번째 요소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말씀으로는 시편 34편1-3절 말씀입니다.
다윗이 가드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선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시기와 미움으로 도망을 가야만 되었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원수 나라에 가야만 되었습니다.
원수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친 척을 해야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합니까?
얼마나 마음에 의심이 생겼겠습니까?
정말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받은 사람이 맞는가?
 
그런 와중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건져주심을 믿고 찬양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일, 졸업, 승진, 기념일 등에 자신을 축하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지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찬양하기에는 인색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탄생일인 성탄절에도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먹고 마시고 온갖 기분을 다 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복을 내리시겠습니까?
 
다윗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찬송을 올려드렸습니다.
곤고할 때도, 실패할 때도, 슬플 때도, 아플 때도, 내겨갈 때도, 위험할 때도, 약할 때도.
그런 삶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풍성한 복을 누렸습니다.
 
여유로울 때는, 형통할 때는 한 번도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어려워지니까 하나님을 원망이나 하고 필요한 사람을 찾다가
그래도 해결이 안 되니까 제일 마지막에 하나님께 나와서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선뜻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겠습니까?
 
잘 나갈 때도, 잘 될 때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고
어려울 때도 불평, 불만, 원망이 아니라 겸손히 찬송을 부르며 나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복에 복을 더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하루,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라도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는 예배자로 살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을 물론 그로 인해 긍휼하심을 얻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