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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4년 10월 31일 금요일 - '두루마리와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v.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v.2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v.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v.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v.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v.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v.7 그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요한계시록 (Revelation) 5장1-7절
 
'두루마리와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오늘 QT 본문은 요한계시록 5:1-14절 말씀입니다.
1-5절은 하나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취하기에 합당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6-10절은 하나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11-14절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요한은 천상의 장면을 보는 가운데
그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손에 일곱인이 찍힌 두루마리를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에 대해 한 천사의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달리 표현하면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사도 요한이 펑펑 울었습니다.
 
하나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가 무엇인가?
그 두루마리를 취하여 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을 취하여 열 수가 없는 것에 대해 왜 요한은 펑펑 울었는가?
 
고대에는 종이가 없기에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글을 적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한 면에만 썼지만 때로는 양면에 쓰기도 했습니다.
한 양피에 쓰면 다른 양피에 쓴 것과 옆을 꿰메어 연결했습니다.
그러니 긴 문서라면 양이 꿰 많고 무겁습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 오른손에서 본 두루마리는 안팎으로 써있었고
또 그 내용을 아무나 보지 못하도록 인봉 (seal)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두루마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향한 구원의 청사진입니다.
대적들에 대한 심판, 이 땅의 구원, 새로운 세상을 창조,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
 
에스겔 선지자도 환상을 통해 유사한 두루마리를 보았습니다. (겔 29-10)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는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그 두루마리를 하나님 손에서 취하여 펼쳐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데
그것을 취할 사람도, 열 사람도 없다면 이 세상은 계속해서 죄와 사망의 권세로
통곡과 탄식과 고통 속에서 소망 없이 지내야 합니다.
그러니 사도 요한이 통곡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과연 누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으며
그 능력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고 열 수 있는가?
죄인인 인간으로서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요 그 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세상을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니 그 분은 자격이 됩니다.
 
그 사실을 24 장로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는 예수님을 이렇게 상반된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 (lion) 그리고 어린양 (lamb)
사자와 어린양이 같은 이미지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맹수의 왕인 사자가 동시에 약하고 힘이 없는 어린양이 될 수 있는가?
사자는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실 권능의 심판주를 의미하며
어린양은 이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신 희생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하실 분이라는 것이 바로 사자와 어린양의 이미지입니다.
 
그 '사자'와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자
네 생물과 24 장로들과 수많은 천사들과
심지어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이 엎드려 경배하며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와 구원의 완성을 노래했습니다.
그것도 새노래로 찬양했습니다.
 
새노래는 어떤 노래인가?
구약시대에는 예배를 드릴 때 항상 찬송이 있었습니다.
그 찬송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찬송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땅히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구속에 대한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노래가 만들어졌고 불리워집니다.
 
또한 새노래는 질적으로 다른 노래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노래를 수도 없이 불렀습니다.
그냥 의미도 모른체, 형식적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환경과 맞아 떨어지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그 찬송이 전혀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뜨거워지고 뜨거운 눈물이 그냥 흘러내립니다.
그 때가 바로 익히 알고 있던 찬양이 질적으로 새로운 찬양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런 경험들이 있습니다.
 
24 장로들 손에는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이 들려 있었는데
그 향기는 바로 성도들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전해집니다.
우리의 원대로, 우리의 방식대로, 우리의 때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그 향기의 기도가 땅에 쏟아지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이 됩니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는, 이 세상을 향한 탄식의 기도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고난과 핍박과 죽임을 당하는 성도들의 서원이 드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언젠가는 응답이 되어 이 땅에 심판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 때가 점점 다가온다고 봅니다.
 
이 세상에는 지금도 탄식과 신음이 있습니다.
죄로 인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탄식과 신음에서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 분이 자신의 피로 세상을 죄의 권세에서 풀어주셨습니다.
그 분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소망이 생깁니다.
그러니 그 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예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그 분이 인봉을 뜯고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십니다.
그 날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깨어서 기도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묵상
요한의 탄식과 같은 탄식이 있는가? (부모, 형제, 친척, 친구, 이웃의 구원을 향한 탄식)
어디에, 무엇에 소망이 있다고 보는가?
부귀영화, 출세, 성공, 장수와 같은 것들이 영원히 보장되고 소망이 되는가?
죄로 인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성도와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인해 생긴 것임을 알고 있는가?
언젠가 성도가 예수님과 함께 세상의 왕노릇 할 것임을 믿고 확신하는가?
그 날을 바라보며 인내하며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나가는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그만 두지는 않는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찬양이 있는가?
거기에 새노래의 의미를 경험했는가?
언젠가 이 땅이 심판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것이라고 믿는가?
이 땅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 질 것을 믿는가?
예수님의 재림이 점점 다가오는데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지금도 이루어져 가고 있으며
언젠가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오시면 완성될 것을 알고
그 분이 언제 오시더라도 기쁨으로 맞을 수 있도록
깨어서 주님을 찬양하며 쉬지말고 기도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