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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4년 5월 23일 금요일 - '부패한 정욕의 추악한 결과'

v.8 다말이 그 오라버니 암몬의 집에 이르매 그가 누웠더라.
     다말이 밀가루를 가지고 반죽하여 그가 보는 데서 과자를 만들고
     그 과자를 굽고
v.9 그 냄비를 가져다가 그 앞에 쏟아 놓아도 암몬이 먹기를 거절하고
     암논이 이르되 모든 사람을 내게서 떠나게 하라 하니
     다 그를 떠나 나가니라.
v.10 암논이 다말에게 이르되 음식물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오라.
       내가 네 손에서 먹으리라 하니 다말이 자기가 만든 과자를 가지고
       침실에 들어가 그의 오라버니 암논에게 이르러
v.11 그에게 먹이려고 가까이 가지고 갈 때에 암논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이르되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지 하는지라.
v.12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v.13 내가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어리석은 자 중의 하라가 되리라.
       이제 청하건대 왕께 말하라. 그라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되
v.14 암논이 그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
                                                            사무엘하 (2 Samuel) 13장8-14절
 
'부패한 정욕의 추악한 결과'
 
오늘 QT 본문은 사무엘하 13:1-14절 말씀입니다.
1-2절은 이복 누이에게 연정을 품은 암논에 대하여
3-4절은 육체의 정욕을 부추기는 간교한 요나답에 대하여
5-10절은 아버지 다윗의 명에 따라 암논을 위해 먹을 것을 만드는 다말에 대하여
11-14절은 다말에게 악을 행하는 암논에 대한 말씀입니다.
 
13장은 다윗의 집안에 생긴 또 다른 불행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이 불행은 다윗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예언하셨던 재앙의 성취입니다.
 
암논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으로 있을 때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에게서 나은 첫 번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세 번째 아들이요 다말은 그의 누이입니다.
 
그런데 암논이 이복 형제인 다말을 사랑한 것입니다.
사랑이라기 보다는 사랑으로 위장된 탐욕이요 탐색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암논이 힘으로, 강제적으로 육체적인 관계를 맺은 것이고
그런 다음에는 다말을 버렸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이렇게 탐욕과 탐색에 빠져 있을 때 그에게 찾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큰 아버지인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입니다.
그는 암논의 사촌형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간교한 자라고 말합니다.
 
이 간교하다는 말은 에덴 동산에 있었던 뱀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고
음녀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고 (창 7:10절)
또한 거짓 선지자를 표현할 때 사용이 된 단어입니다. (렘 23:26절)
 
그가 암논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는 암논의 말을 듣고 그것이 하나님께 범죄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욕망에 불을 붙여서 그 일을 행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래서 암논은 그것을 좋게 받아들였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핑계를 대고 다말을 오게 했고
사람들을 다 내어 보낸 후 단 둘이 침상에 있게 한 다음
자기 힘으로, 이복 여동생을 성폭행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그 결과가 자녀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 것과
육체의 욕망이 얼마나 사람을 추하게 만드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친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려줍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새를 막을 수는 없으나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이 말은 우연하게 자극을 주는 장면을 볼 수 있고, 그런 환경에 놓일 수 있지만
그것을 이겨낼 수는 있다는 말입니다.
생각이 행동으로까지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청년의 때에 그런 육체의 본능을 제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혼자 있을 때 더더욱 그렇습니다.
혼자 있을 때 마귀는 달콤하게 속삭입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
네가 원하는 것을 가져라.
너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 그렇다.
간교한 요나답이 바로 그런 마귀의 도구였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듣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세상에 속한 사람의 말입니까?
우리 주변에 잘못된 욕망으로 가고 있을 때 바르게 조언해줄 사람이 있습니까?
영적으로 염려하고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기도해 주는 좋은 믿음의 친구가 있습니까?
달콤한 말을 좋아합니까 아니면 직언을 좋아합니까?
 
사도 바울은 세상 마지막 때가 되면 바른 교훈의 말씀은 듣기 싫어하고
대신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고 했습니다. (딤후 4:3)
바른 말 하는 것은 듣기 싫어하고 그저 욕망대로 살라고 하는 말은 좋아합니다.
죄에 대해 듣는 것은 싫어하고, 죄를 범한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싫어하고
그저 복을 받고, 잘 되고, 괜찮다는 말은 좋아합니다.
 
그런 부추김의 결과 암논은 힘으로 이복동생인 다말을 성폭행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근친상간의 죄입니다. (레 18:9, 11, 신 27:22)
간음한 죄입니다. (출 20:14)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타락한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몇 가지 증세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갈 5:19-21)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
그러면서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계신, 거룩한 곳에,
부패한 정욕대로 사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성에 대해 너무나 관대합니다.
고귀하고 순결한 사랑이 아니라 육체적인 사랑을 미화시킵니다.
그런 사람이 당연하고 더 멋있게 표현도 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무릇 지켜야 할 것은 마음입니다.
우연히 보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겨가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어떻게 마음을 지킬 수 있는가?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더러운 곳에는 우선 가지 말고 피해야 합니다.
바르지 않은 것에 대해서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친구에게 도움도 청하고 기도도 해야 합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도 바울도 날마다 갈등했습니다.
부패한 사람의 마음이 하루 아침에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싸워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따라가지 않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럴 때 육체의 부패한 열매가 아니라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싸움입니다.
 
묵상
사탄의 은밀한 속삭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혼자 있을 때 그런 유혹이 많지 않는가?
성적인 유혹이 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
날마다 말씀을 보고, 순간순간 기도하여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는가?
너무나 쉽게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은 아닌가?
가까운 친구가 어떤 사람들인가?
직언을 하고, 바르게 잡아줄 친구가 있는가?
혼자 힘으로 되지 않기에 소그룹에 참석하고 고민을 꺼내놓고 기도도 부탁하는가?
성령의 열매가 조금씩 맺어가고 있는가?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가?
혹시 육체적인 사랑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바른 말을 달게 받는가?
죄에 대해, 죄의 결과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는가?
육체의 정욕대로 살다가 후회한 적은 없는가?
진정으로 정욕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치는가?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가?
은혜를 기억하고, 은혜를 갚아가는 삶을 살려고 애쓰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이 부패한 본능을 추구하는 약한 인생임을 알고
말씀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하고, 바른 길이 아니면 거절하고,
또한 진리의 길을 가도록 도와주는 좋은 친구가 되어
육체의 정욕을 이기고 거룩함을 드러내는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