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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4년 8월 1일 금요일 - '겸손과 섬김의 왕 예수 그리스도'

v.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v.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v.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v.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v.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v.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v.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는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Mark) 11장4-10절
 
'겸손과 섬김의 왕 예수 그리스도'
 
오늘 QT 본문은 마가복음 11:1-10절 말씀입니다.
1-3절은 나귀 새끼를 준비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4-7절은 말씀에 순종하여 데리고 온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에 대하여
8-10절은 군중들로부터 찬송을 받으시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를 떠나셔서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 건너편 감람산 가까이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근처에 도착하셨습니다.
베다니에는 예수님께서 종종 들리셨던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가 삽니다.
문둥병에 걸렸다가 고침을 받은 시몬도 삽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비싼 향유를 부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걸어서 오셨지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는
나귀도 아니고 나귀 새끼를 타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 둘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서 가지고 오라고 하신 겁니다.
물론 주인이 있으니까 주인이 물을 터인에 그러면
주가 쓰시겠다고만 하면 준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순종하여 갔습니다.
그리고 갔더니 실제로 한 번도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
나귀 새끼가 있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주인이 묻고
가르쳐 주신 대로 말을 했더니 순순히 응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
구약의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입니다.
어디에 이런 예언이 기록되어 있는가?
스가랴 9:9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선지자는 학개 선지자와 함께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올 때가
기원전 538/7년 입니다.
아마도 이 예언서가 기록된 시기는 BC 520년 전후로 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시기 거의 550여 년 전에 예언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되었던 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유대인의 왕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이런 모습이 유대인들의 눈에 진정한 메시아로 비춰졌겠는가?
아닙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힘을 가지고 승리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겁니다.
그런 승리자의 모습은 백말을 타고, 화려한 안장에 앉은 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그런 기대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겸손한 모습으로 들어오십니다.
나귀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람이 타기도 했고, 짐을 싯기도 했으며, 밭을 가는데 쓰이기도 했습니다.
나귀 자체에는 순종과 섬김과 겸손의 이미지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되었던 대로 그런 이미지로 들어오시지만
12 제자들을 포함하여 따르는 무리들 중에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예언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두 가지를 했습니다.
하나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폈고
다른 하나는 호산나 찬송을 부른 것입니다.
호산나는 시편 118:25절에 나오는 것처럼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 상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군중심리로, 기대로, 예수님을 다윗의 나라를 이루실 분으로 여기고 들어옵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모습과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메시아의 모습은 너무 다릅니다.
사람들은 왕이나 전쟁 영웅이 개선할 때와 같은 모습을 기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겸손히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뜻은 예언이 되었고 때가 되어 성취가 되었습니다.
 
한 번도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 나귀 새끼.
아직 어미로부터 떨어진 적이 없는 연약한 모습의 나귀 새끼.
예수님께서 타시기가 쉬웠겠는가?
타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고, 탄 이후에도 뒤뚱거리거나
아니면 무거워서 뒷발질을 하거나 뛰는 모습.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초라한 겉옷이 걸친 나귀 새끼를 탄 모습을 보고
과연 누가 영광스러운 승리의 왕, 메시아로 여기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광스러운 자리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높이 올라가는 권세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분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지만 사흘째 부활하실 것이라고 하셨고
제자들에게는 따라오려거든 십자가를 지는, 섬기는 자들이 될 것을
몇 차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조차 그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한 자리 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왜 믿는가?
무슨 이유로 예수님을 찬양하는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 당시 제자들과 군중들 처럼 세상적인 생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은 없는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요 만왕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시고 겸손하게 가셨는데
우리는 화려하고 비싸고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따라가고자 하지 않는지?
우리의 모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여지는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묵상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과 오늘날과 맞지 않다고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것은 없는가?
예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은 아닌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말씀과 다르다면 기꺼이 자신의 길을 포기하겠는가?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본받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많은 일을 하고도 겸손히 자신을 낮추겠는가?
화려하고 비싼 것을 좋아하고 탐하는 마음은 아닌가?
예수님의 제자로, 으뜸이 되기 위해, 큰 자가 되기 위해 섬기겠는가?
무엇 때문에 찬양을 하는가?
기분이 좋을 때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도 찬송을 드릴 수 있겠는가?
 
오늘 하루,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며
그 분과 같이 고난과 겸손과 순종의 삶을 따라감으로
진정으로 기쁨의 찬양을 드리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