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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4년 7월 30일 수요일 - '제자는 섬기는 자'

v.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v.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v.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으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v.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v.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v.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Mark) 10장40-45절
 
'제자는 섬기는 자'
 
오늘 QT 본문은 마가복음 10:32-45절 말씀입니다.
32-34절은 세 번째로 받으실 수난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35-40절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41-45절은 크고 으뜸이 되려면 섬겨야 하고 대속물로 오셨음을 밝히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받으실 수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가장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1. 수난당하시는 장소가 예루살렘이다.
2. 수난을 주는 자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다.
3. 이방인에게 넘겨질 것이다.
4. 능욕과 침 뱉음과 채찍질을 받고 죽으실 것이다.
5.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전과 같이 이 말씀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될까 두려워하여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가진 잘못된 메시아관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대하고 있는 메시아는 모세와 같이 큰 기적을 행하시고
대적들은 심판하시고 나라를 구원하실 그런 정치적인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고난받는 종에 대한 예언은 이사야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잘못된 생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무지를 드러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마음 속에 있는 욕망도 드러냈습니다.
 
처음으로 수난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는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책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자신들을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머지 10명은 분개했습니다.
그 말은 그들 또한 야고보와 요한과 같이 한 자리를 하고자 하는
탐심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도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번이 세 번째 제자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 번째는,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님을 좇으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첫째가 되고자 하면 끝이 되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도는 모두 세상 가치관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그저 위로 올라가서 권세로 다스리고자 하고 섬김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낮아져서 꼴찌가 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으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세상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제자들은 놀라고 낙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시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대속물이 되심을 밝히셨습니다.
대속이라함은 (ranson) 시장에서 노예와 관련된 말로
노예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지불하는 몸값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이라고 하심은
많은 사람들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대가는 바로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가시기 위해 오셨고, 죽음으로 섬기는 본을 보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따라가는 것이 진짜 제자됨을 다시 알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해서는 허황된 꿈을 깨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섬김이라는 헬라어가 '디아코니아' '디아코노스'입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의 deacon 즉 집사가 나왔고
이 단어를 라틴말로 바꾼 것이 바로 ministry (목사, 장관) 입니다.
결국 세상적인 리더든, 영적인 리더든 모두가 섬기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섬기는 자가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고 하니 문제가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따라나섰을 때는 세상적인 권세를 기대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볼 때 제자들은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변화가 된 것이 아니라 변질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오신 목적과 제자도에 대해 몇 번이나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들으려고,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세상 원리는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직분과 세상의 직분은 다릅니다.
교회의 직분은 섬기라고 주신 겁니다.
낮아지라고 주신 겁니다.
종이 되라고 주신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되었습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고,
높아지려고 하고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잘못된 직분자들로 인해 교회 안에 분쟁이 있고
세상으로부터도 조롱과 비난을 받습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가장 먼저는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이요
시작부터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요 (직분을 이익의 도구로 삼으려고)
변화가 아니라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된 후 바뀜)
그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도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들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역은 섬기는 겁니다.
그래서 잘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직분이라는 타이틀은 갖기 원합니다.
 
중보하는 기도가 가장 중요한 섬김의 길입니다.
교회의 영적인 리더가 되어 이것을 하지 않으니까
성경을 읽지도, 배우려고도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뜻대로 하려고 목소리를 높이고
분쟁을 일으키고 파를 만들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고 돌이키지 않으면 가룟 유다와 같은 비참한 삶이 될 뿐입니다.
 
묵상
주님을 믿는 목적이 무엇인가?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을 바라고 오는가?
기도하면서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자기 영광인가 하나님의 영광인가?
자기 욕심대로 구하고 응답이 되지 않으면 서운해 하고 불평하는 것은 없는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하는가?
제자라면 섬기는 것이 있는가?
교회의 직분이 세상의 직분과 다른 것을 알고 그런 길을 가기 위해 직분자가 되고자 하는가?
지금 직분자라면 섬기는 것이 있는가?
혹시 변질된 것은 없는가?
섬기는 것이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지치지 않고, 시험에 들지 않고 섬길 수 있겠는가?
꼴찌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낮아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기도와 말씀을 끊임없이 읽고 묵상하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본을 보이신 대속의 길을 생각하며
과연 제자로서 따라가려고 하는지 아니면 제자들처럼 높이 되고자 하는지 돌아보고
처음 믿을 때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낮아져서 섬기려고 애쓰는
변화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알림>
오늘 저녁 7시에는 청년들 모임이 있습니다.
 
목요일에 리더 모임이 있습니다. (7시)
 
금요일에는 경배와 찬양 예배가 있습니다. (7시)
이어 청년부 소그룹 모임도 있습니다.
 
토요일에는 아침기도가 았습니다. (7시)
 
주일에는 정기 제직회가 있기에 기도로 준비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