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31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v.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던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v.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사무엘하 (2 Samuel) 18장31-33절
'무엇을 듣기를 원하는가?
오늘 QT 본문은 사무엘하 18:24-33절
말씀입니다.
24-27절은 압살롬의 소식을 눈 빠지게 기다리는 다윗에 대하여
28-30절은 전령들을 통해 압살롬의 소식을 묻는 다윗에 대하여
31-33절은 압살롬의 죽음을 듣고 슬퍼하는 다윗에 대한 말씀입니다.
압살롬이 죽었고 전쟁은 끝났습니다.
다윗은 아직 그 소식을 듣지 못해 성읍의 두 문 사이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벽 위에 있던 파수꾼이 누가 온다고 할 때마다 다윗은
그들이 좋은 소식을 가져 올 것이라고 스스로 자신을 위로합니다.
가장 먼저는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로부터 왔습니다.
그는 왕의 평안을 물은 다음 곧 바로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물리치셨기에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압살롬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아히마아스는 자신이 떠나올 때 요압 진영에서 큰 소동이
있었지만
자신은 그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한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압살롬이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요압으로부터 2번이나 소식을 전하는 것을
거부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는 나쁜 소식을 피하고 좋은 소식만 전함으로 상급을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기대와는 다리 그냥 곁에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전령인 구스 사람이 와서 다윗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그는 기쁜 소식을 가져왔다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왕에게 반역하는 자들을
멸하시고
원수를 갚으셨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구스 사람의 보고에도 다윗은 기뻐하지 않고 다시 압살롬의 소식을
묻습니다.
구스 사람은 압살롬이 죽었다고 바로 말하지 않고
왕의 원수와 왕을 대적하는 자들이 다 압살롬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함으로
압살롬이 죽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압살롬이 죽은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문 위층으로 올라가 혼자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까지는 청년 압살롬이라고 불렀지만
죽은 후에는 무려 다섯 번이나 아들 압살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자신이 대신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탄했습니다.
그 말은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에 크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크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일생 동안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울과 요나단, 이스보셋 그리고 아브넬이 죽었을 때도 울었지만
자신의 아들들 때문에 흘린 눈물도
많습니다.
밧세바와 관계에서 낳은 아들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금식하며
울었습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외가 그술 땅으로 도망했을 때도 날마다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지금 압살롬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다윗이 아버지로 통곡하는 것이 당연한가?
압살롬은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첩들을 취했습니다.
그런 압살롬이 자식일 수 있는가?
부모는 자식으로 여깁니다.
어떻게 보면 애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밉지만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더욱이 다윗은 자신이 밧세바와의 관계로 인해 아들이 죽었다고
여깁니다.
또한 자신이 자녀들을 말씀과 훈계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니 그가 비록 패역한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슬피울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모는 죽으면 땅에 묻히고 자식은 죽으면 가숨에
묻는다'
참 맞는 표현이라고 여깁니다.
그렇게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하고 속을 썪이던 자녀지만
막상 죽으면 후회스럽고 가슴이 아픕니다.
다윗의 군대가 비록 전쟁에서 이겼지만 이 전쟁은 상처 뿐인
영광입니다.
동족끼리 싸워 수 만 명이 죽었으니
전쟁에서 이겼지만 아들이 죽었으니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에 대해 기뻐했어야
했습니다.
부하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그들 중에 피해자는 없는지 물었어야
했습니다.
부하들은 그 승리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단숨에
달려와서 전했는데
다윗은 오직 자기 아들의 소식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부하들은 이해할 수가 없으며 승리하고도 기뻐할 수도
없었습니다.
부하들은 전쟁에서 승리케 한 하나님을 찬양했는데
다윗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기만 했습니다.
무엇이 좋은
소식입니까?
무엇을 듣고 싶어
합니까?
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듣고 싶어합니다.
자신을 알아주던, 자신의 자녀를 알아주던 자기에게 관한 좋은 것을 듣고 싶어
합니다.
복받는다는 소리를 듣기 원합니다.
칭찬받는 소리를 듣기 원합니다.
용서받았고 깨끗하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기 원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듣기를 원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는 예리한 검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침례 요한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저 좋은 말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켜야 하는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가장 들어야 할 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권세를
멸하셨습니다.
또 사흘째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망의 권세도 멸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쁜 소식인
복음입니다.
이것은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의 제일 마지막 편지가 디모데후서입니다.
거기
4:3-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믿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좋으리니'
마지막 때가 되면 죄에 대해, 교훈과 책망에 대해
듣기 싫어합니다.
대신 자기 마음에 드는 소리를 듣고자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설교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곳 저곳 교회를 샤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죄에 대한 설교가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회개에 대한 설교가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모두가 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을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자기가 듣고 싶은 소식만 듣는 부페가
아닙니다.
교회는 자기가 좋아하는 소식만 편식하는 곳도
아닙니다.
교회는 골라먹는 재미가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고 들어야 하는 곳입니다.
다윗은 자녀를 사랑하면서도 그 아들을 만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녀를 사랑하면서도 제대로 훈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녀를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녀가 잘못하면 화만 내었지 그냥 넘어갔습니다.
결국 그런 방치가, 무관심이, 내버려둠이
자녀를 죽음으로까지 가게 했습니다.
만약 다윗이 제대로 교육했더라면 아버지를 죽이려고 대항하는 모반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하지 않아서 죽고 나니 그 때서야 후회하여 통곡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묵상
자신이 교회에서, 설교에서 가장 듣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설교를 들을 때 마음에 찔림과 아픔과 깨달음이 있는가?
설교를 듣고 죄를 알고 회개함이 있는가?
그저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고자 함이 있는 것은 아닌가?
설교의 가장 중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여야 함을 믿는가?
구원의 복된 소식으로 인해 어떤 경우든 기뻐할 수 있는가?
어떤 소리를 들어야 영적인 갈급함이 채워질 수 있는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궁국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하는가?
자녀를 사랑하기에 잘못하는 경우 바른 훈계를 하는가?
자녀가 공부만 잘하면 다른 것은 잘못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은
없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십자가에 대한 말씀인지
아니면 자기 마음을 흡족케 하는 말인지
돌아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진정한 성도, 진정한 교회를 만들어가시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