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에는 저희 교회에서 파송받고 떠난 세 가정이 삽니다. 김영권/이정연 전도사, 박종원/안원미, 유석/변숙현/하영/하준. 혹시나 해서, 염려가 되어 2 가정과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두 가정 모두 전혀 피해가 없었다고 해서 안심이 되었습니다. 사건이 터졌던 시간 박종원/안원미 부부는 결승점에서 걸어서 약 10분 정도 되는 거리에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엄청난 소리는 들었지만 무슨 일인지는 당연히 몰랐다가 나중에 들었다고 했습니다.
토요일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Salt Lake에서 국제 마라톤 대회가 있었습니다. 보스톤과 비교하여 작은 도시이기에 그런 사고가 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불안함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아무런 사고도 없었습니다. 이 날에는 토요 아침기도회가 있는 경우 교회 앞 길이 막혀 아침기도회가 취소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금년에는 잊고 있었는데, 그래도 마침 금요일이 심야기도회라 토요 아침기도가 없어서 불편함은 없었습니다. 사고도 없었고 불편함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괜찮지만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사람이나 가족들은 지금 어떨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당하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또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마음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거기에 자기 자녀가 살고 있다면, 친척이 살고 있다면 그렇게까지 무관심하지 않을 겁니다. 갈수록 자기 중심적인 삶이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많은 현상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 무관심과 무감각이 갈수록 심해집니다.
누군가 이런 재미있는 공식을 만들었습니다. ‘나쁜 놈 = 나 뿐인 놈’
이 말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적인 사람이 바로 나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단지 그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인간의 악함을 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기준이 자기 몸을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같은 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 주는 희생과 헌신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겁니다. 믿음의 사람이요,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애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전히 우리의 모습에는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제직회의, 여 선교회 월례회의, 심야기도회, 교회연합 중보기도 모임, 주일 교제, 교회 여러 부서에서의 섬김. 별 상관이 없다고 여기고 무관심하거나 자신의 책임도 다 하지 않는 모습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자신만 편하면 된다고, 자신이 관계된 일에만 관심을 보인다면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과연 그런 공동체의 모습을 우리 주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실까? 자신이 필요할 때만, 자기의 것을 놓고 기도하는 그 모습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며 응답하실까? 오늘날 세대가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이런 세대는 아닌지, 우리의 모습이 나쁜 사람의 모습은 아닌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세대’ (마태복음 11:15-19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서 지금도 기도하시는 주님과 성령님. 너무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