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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3년 4월 16일 화요일 - '가정/교회/사회 공동체를 회복하는 길'

v.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v.31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v.32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 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v.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려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v.34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께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데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창세기 (Genesis) 44장30-34절
 
'가정/교회/사회 공동체를 회복하는 길'
 
오늘 QT 본문은 창세기 44:14-34절 말씀입니다.
 
14-17절 말씀은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는 유다에 대한 말씀이고
18-29절은 베냐민과 아버지 야곱에 대한 설명의 말씀이고
30-32절은 베냐민에 대해 유다가 야곱에게 한 약속의 말씀이고
33-34절은 베냐민을 대신하여 자신이 종이 되겠다는 유다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셉은 다시 곡식을 사러 온 형제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는 나이 순서대로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후
베냐민에게는 형들의 5배나 되는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지켜 보았습니다.
거기서도 그는 형들의 질투나 시기를 보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요셉은 형들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한 번 더 시험을 합니다.
그것은 요셉이 아끼는 은잔을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 넣고 베냐민을 볼모로 잡는 시험입니다.
형들은 영문도 모른체 가다가 따라온 요셉의 청지기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두 가지를 확언했습니다.
하나는 만약에 누구든지 그 잔이 발견되는 자는 죽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 모두가 요셉의 종이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자신들이 절대로 훔치지 않았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냐민의 자루에서 그 잔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은 옷을 찢고 그 청지기의 말대도 자신들도 돌아가지 않고 모두 요셉에게 왔습니다.
옷을 찢는다는 것은 비통과 슬픔의 표현입니다.
 
요셉의 이야기에는 꿈과 옷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옷을 벗고 입음에 따라 요셉의 형편도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르우벤이 요셉이 없어진 것을 알고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야곱도 요셉이 짐승에게 죽은 것으로 알고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이제는 요셉의 채색옷을 찢었던 형들이 억울하고 답답하고 슬퍼서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는 요셉에게 와서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했습니다.
그 이야기에는 요셉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자신들이 요셉을 팔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버지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바로 요셉과 베냐민임을 말합니다.
심지어 유다는 야곱과 베냐민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기에
만약 베냐민이 못 가면 아버지가 죽을 것이고
그로 인해 자신은 평생 죄책감에 살게 될 것이라고 진실하게 말한 다음
대신 자신이 남겠으니 베냐민을 보내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편애와 시기와 질투로 얼룩졌던 야곱의 가족이 변화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형들은 아버지의 편애를 인정하고 용납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편애를 싫어하여 요셉을 죽이려고도 했고 팔아버렸지만
막내 베냐민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위해 목숨을 걸 정도로 그를 아꼈습니다.
 
베냐민을 아끼는 것은 또한 아버지를 아끼는 것과 같습니다.
오죽하면 유다는 베냐민과 아버지의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까지 했겠습니까!
그만큼 그들은 과거 요셉에게 했던 행동을 기억하고 베냐민에게는 하지 않았고
편애하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용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요셉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을 본 이유도 있지만
그들 스스로도 결혼을 하고 자녀를 키워보니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자녀는 모두가 소중하지만 똑 같이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들을 보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더 달라진 것은 이제는 그 편애하는 동생을 미워하기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생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베냐민을 버리고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가 돌아와서 종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특히 유다는 자신이 대신 남겠으니 베냐민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요셉의 일로 인해 늘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이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죄를 찾으셨다고 했습니다.
핏값을 치루고 있다고 했습니다.
 
인생길은 험난합니다.
고난은 옵니다.
변명한다고 해서 되지 않는 억울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을 푸는 길은 진실함과 간절함에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풀어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도 위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직장이든 사회든.
이런 위기의 때에는 책임을 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로 원망하고 비판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희생하고 섬기고 책임을 질 때
그 공동체는 새롭게 바뀔 수 있습니다.
위기가 기회가 되어 역전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서로를 사랑하는 것으로 인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묵상
가정에 있어서 자신은 어떤 위치에 있으며 가족에 대해 무엇을 하는가?
사랑하며 관심을 가지고 희생하려고 했는가?
부모에 대한 감사함과 사랑의 빚진 자로 순종하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희생과 섬김은 피하려 하고 시기와 질투와 원망밖에 없는 것은 아닌가?
교회 공동체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형제요 자매인데 어떻게 대하는가?
관심이 있는가?
섬기며 책임을 지는 믿음의 삶을 사는가?
오히려 시기하고 질투하고 헛된 소문을 퍼뜨리고 상처를 주는 것은 없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어도 고난이 옴을 아는가?
그 고난을 자신이 지은 죄로 여기고 삶을 돌아보려는 시도가 있는가?
고난을 영적으로 해석해보려는 영적 민감함이 있는가?
오해를 풀 수 있는 것은 변명과 설명이 아니라 진실함과 간절함으로 가능하다고 보는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라고 여기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관심과 사랑으로 책임을 짐으로 인해
서로 신뢰하고 이해하고 섬김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시작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알림>
금년 교회 목표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질화하는 해' 입니다.
 
'오늘 QT 하셨습니까?'
개인의 삶에, 그리고 어떤 모임이든 그날의 QT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화요 캠퍼스 모임이 union cafeteria에서 있습니다.
화요일 7:30에는 기도 모임이 있습니다.
 
수요일 7시에는 리더 모임이 있습니다.
 
금요일 7시에는 간증과 찬양과 기도의 심야기도회가 있습니다.
목자, 리더, 제직들은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토요일에는 Utah Food Bank 자원봉사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9:30분에 떠납니다.  시간 맞추어 오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 암송구절은 요한복음 14장16절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