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v.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v.37 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의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v.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v.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v.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Luke) 19장35-40절
'참된 찬송'
오늘날 교회에서, 가정에서, 소그룹 모임에서, 기도할 때 찬양을 부릅니다.
찬양은 어떤 의미입니까?
단순히 순서에 따라 하는 것인가?
찬송은 단순히 입으로 부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삭개오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 기적들로 인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 무엇인가 이루어질 것 같은 기대감으로
큰 소리로 찬양을 부르며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옹위하며 들어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은 중요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로 예수님이 바로 구세주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열왕기상 1:33절의 모습처럼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 즉 왕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의 왕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죄와 사망의 권세를 없애기 위해 오신 평화의 왕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영광의 왕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들이 부른 찬양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평화이고
다른 하나는 영광입니다.
참된 찬송은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요, 구세주요, 이 땅의 주인되심을 믿는 고백입니다.
그런 믿음이 없는 형식적인, 입술만의 찬송은 헛된 노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되십니다.
하나님은 찬송 가운데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런 왕권과 주권을 믿고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찬미의 제사가 됩니다.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듯이
찬송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초대 예루살렘교회에는 많은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나눔입니다.
그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기쁨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죽더라도 바로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자신이 단지 기분 좋을 때 흥얼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왕 되심과, 구세주 되심과, 주인 되심에 대한 고백입니다.
찬양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찬양은 어려울 때 건져주심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찬양은 회복을 갈망하는 기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기쁨으로 들어올 때
오히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기에
아니 처음부터 예수님을 알려고도,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향해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을 오히려 막으려고 했습니다.
자기 의에 도취된 사람들
자기 자랑에 생명을 건 사람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하는 사람들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
마음의 문이 꽉 닫힌 사람들
자신의 교만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구원의 기쁨을 찬양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렇게 열심으로 찬양을 부르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이런 바리새인들과 같이
자신이 마치 예배와 찬송을 받는 것처럼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드니, 어디가 틀렸느니.
곡이 너무 어렵고 너무 빠르다고 불평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찬송가를 잘 알고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배우려는 마음도 없고 찬양 자체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마음의 문은 꽉 닫혀있고, 형식과 전통에 매여서 자기 고집대로 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악기 조차도 불만을 가지고 못하게 합니다.
냉냉한 마음이고 뜨거움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얼굴에 불만과 불평과 시기가 가득합니다.
용서가 아니라 미움이 가득합니다.
그런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런 예배자에게 은혜가 있겠습니까?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이 들어갑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좋으면 춤추고 노래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들입니다.
받은 구원이 있고 받은 은혜가 있기에 당연히 춤추고 기뻐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것을 막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막는 죄입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
외적으로는 잘 섬기는 척 하면서,
찬양과 감사가 없다면
그 믿음은 가짜이거나 은혜를 잊은 사람입니다.
묵상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쁨의 찬양이 있습니까?
자신이 예배와 찬양을 받는 것처럼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이 찬양하는 것을 막거나 못마땅하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자신을 찬양하는, 자신이 찬양받기를 원하는 죄를 범하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하루, 눈앞에 당장 달라진 것은 없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기쁨을,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인으로 모신 기쁨을
고백하는 찬양을 종일토록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뿐만 아니라
뜨거웠던 처음 사랑도 회복하는 예배자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알림>
교회 홈페이지가 utahchurch.org로 바뀌었습니다.
금년도 교회 목표는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순종의 해'입니다.
오늘 9:30분에는 경건의 나눔 모임이 있습니다.
금요일 7시에는 경배와 찬양 예배가 있고 이후에는 청년부 소그룹 모임이 있습니다.
토요일 7시에는 아침기도회가 있습니다.
토요일 11시 Sugarhouse Park에서는 한인회가 주관하는 추석한가위 잔치가 있습니다.
(Parley's Creek)
주일에는 정기 제직회가 있습니다.
이번 주 암송구절은 히브리서 11장3절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