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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4년 10월 29일 수요일 - '중산층 영성에 대한 경고'

v.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v.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디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v.16 네기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고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v.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v.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v.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v.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Revelation) 3장14-20절
 
'중산층 영성에 대한 경고'
 
오늘 QT 본문은 요한계시록 3:14-22절 말씀입니다.
14-16절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신앙에 대한 경고에 대하여
17-19절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과신과 착각에 대한 경고와 권면에 대하여
20-22절은 연합을 통한 교제와 승리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소아시아의 7 교회들 가운데 제일 마지막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히에라볼리와 골로새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부유했던 도시로, 비싼 양털 옷과 은행업 그리고 의과대학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신들을 위한 신전들도 많았습니다.
(아폴로, 아스클레피오스, 하데스, 헤라, 아테나 등등)
그렇지만 광물이 부족하고 특히 물이 부족했기에 관을 통해 물을 공급받았습니다.
이 교회는 경제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었던 교회였지만
놀랍게도 주님으로부터 책망만 받았던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로 크게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1. 뜨겁든지 차겁든지 하라.
그들의 신앙은 미지근했습니다.
이 미지근함은 두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가장 전통적인 해석은 히에라볼리에서 흘러오는 뜨거운 온천물에 대한 해석으로
7km나 떨어진 곳에서 흘러오던 뜨거운 물이
라오디게가 가까이 오면 다 식어버려서 미지근한 물이 됩니다.
그러면 이 미지근한 물은 목이 마른 나그네들에게 시원함도 주지 못하고
또한 피곤한 사람들에게 회복을 줄 만큼 뜨겁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물이 되었는데
이와 같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렇게 도전이 되지 않는
주변과 구별이 되지 않는 신앙을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또 다른 해석은 식사 습관을 염두에 두신 비유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음식은 차거운 것이 좋을 때가 있고 뜨거운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더울 때는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시원한 음식이 필요하고
추울 때는 따뜻함을 제공하는 음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차겁지도 뜨겁지도 않는 음식은 어느 잔치에서나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떤 해석이든, 미지근한 신앙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기에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시고 토하고 싶어하시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영적인 안목을 회복하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웠습니다.
그들은 비싼 양털로 된 옷을 입고 다녔으며
프리기아 의과대학에서 만든 안약을 발랐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녔고 선한 행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행위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부족함이 없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가난한 자들이다.
그들이 비싼 옷을 입고 다니지만 실상은 벌거벗은 자들이다.
그들이 안약을 바르고 다니지만 실상은 눈이 멀었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하면서도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관점은 바로 영적인 관점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물질의 풍요에 빠져서
영적으로 안일함에 빠진 영성을 중산층 영성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적당히 세속적인 유익을 누리면서
신앙적으로는 열심이 없이 형식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앙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매 주일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합니다.
적당한 봉사도 합니다.
십일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어쩌면 자신을 보이기 위해,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외적으로 종교행위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그런 영적인 침체에 빠진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과 같이 하지 않는 사람을 너무나 쉽게 비판합니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과 은혜와 찔림이 없습니다.
그러니 삶에 변화가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사랑하사
회개하고 열심을 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런 외적인 행위도 없었더라면
그냥 내버려 두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영적으로 침체 된 자들을 사랑하셨기에
그들이 다시 하나님과 주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열심을 회복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연합하여 풍성한 교제를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회복을 위해, 그 교제를 위해 예수님은 계속하여
그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이 20절 말씀을 근거로 하여 그린 그림이 바로
Holman Hunt의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특징은 문의 손잡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없는가?
예수님께서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열려고 해서
손잡이가 안에 있기에, 안에서 열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삶 속에 오셔서 교제하게 하려면
그 사람이 마음의 문을, 안에서 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억지로 들어오시지 않으십니다.
기회는 주시지만 강요하지 않는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지만 결과는 우리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자기 열심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일이 그런 대로 풀릴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으면 곧 실망하고 원망하고
그러다가 실패하고 맙니다.
지속적으로 열정을 가지고 계속하려면
모든 것의 근원되시는, 승리케 하시는 주님과 함꼐 하는 삶입니다.
날마다 그 분이 주신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을 만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의 시작이요 풍성한 삶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묵상
예수님의 평가와 사람들의 평가가 같다고 보는가?
지금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신앙을 진단하신다면 어떻게 하실 것 같은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미지근하여 토하여 버리고 싶다고 하시지는 않는가?
자신의 믿음생활이 열정이 있다고 보는가?
그저 주일예배에 만족하거나 아니면 맡겨진 일을 억지로 하지는 않는가?
예배에 참석하고, 예물을 드리고, 봉사를 한다고 해서 그 신앙이 온전하다고 볼 수 있는가?
그런 신앙이 누구를 위함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함인가 아니면 자기 만족인가?
'중산층 영성'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외적으로는 신경을 쓰고 열심을 내지만,
실제로 마음을 감찰하시고 생명의 근원되시는 주님과는 아무런 교제가 없는 삶은 아닌가?
자신이 영적으로 건강하다고 보는가?
자신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과 좋은 교제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말씀에 대한 갈급함과 감동과 찔림이 있는가?
예배에 대한 감격도 있는가?
지금도 문을 두드리시는 소리를 듣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가?
영적인 침체를 극복하려면, 열정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말씀과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는 경건의 시간이 없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모든 행위를 아시는 주님께서 믿음을 어떻게 진단하실지
혹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칭찬은 없이 책망만 하실 것은 아닌지
말씀으로 자신을 비춰보고
혹시라도 사랑이 없이, 열정이 없이 형식적이거나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돌이켜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를 회복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