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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4년 10월 15일 수요일 - '인간의 한계인 죽음 앞에서 의미 있게 사는 법'

v.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v.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v.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v.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전도서 (Ecclesiastes) 9장7-10절
 
'인간의 한계인 죽음 앞에서 의미 있게 사는 방법'
 
오늘 QT 본문은 전도서 9:1-10절 말씀입니다.
1-3절은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죽음에 대하여
4-6절은 죽은 자보다 산 자가 나음에 대하여
7-10절은 죽음 앞에서 의미 있게 사는 방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전도자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지만
사랑을 받을 것인지 미움을 받을 것인지 알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든 세상에서 맞는 결말이 똑 같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마음에 악이 가득한 채로 살다가 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연 그들이 이 땅에 있는 동안, 또한 죽은 이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지 미움을 받았는지
구분할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에
인간의 아무리 지혜로워도 그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삶의 법칙이 바로 인과응보입니다.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현실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더욱이 반대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 누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지 미움을 받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그런 모순된 인생을 다섯 개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의인 vs 악인
선한 자 vs 죄인
깨끗한 자 vs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 vs 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
맹세하는 자 vs 맹세하기를 무서워 하는 자
 
신약에서도 이와 같은 대조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양 vs 염소
알곡 vs 쭉정이
좋은 물고기 vs 나쁜 물고기
지혜로운 여인 vs 지혜롭지 못한 여인들 (기름등불을 준비함에 있어서)
착하고 충성된 종 vs 악하고 게으른 종
 
하나님 앞에서 누가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 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누구라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믿으면
그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키면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집니다.
의인은 영생으로, 악인은 영벌로 떨어집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불합리와 불공평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그 때도 모르지만
인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의미있게 살아야 합니다.
불합리하고 불공평하고 부조리가 있다고 불평한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 귀한 인생을 늘 불평과 원망과 미움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런 인생이 행복하겠습니까?
 
전도자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면서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 앞에서 의미 있게 사는 법을 세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첫째, 즐겁게 살라.
즐거운 마음으로 먹고 마시라고 했습니다.
흰 옷과 머리향 기름은 윤택한 삶을 의미합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먹고 마시고
돈이 없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마음으로 먹고 마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기쁜 마음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결단이요 이것은 마음의 문제이지
외적인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요 10:10)
그렇다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모두가 다 물질적으로 풍요하게 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환경적으로, 외적으로 보기에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 영생을 얻어 즐거운 마음이 바로 풍성한 삶입니다.
그런 확신을 가진 사람은 없어도 나누어주는 삶을 삽니다.
반대로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졌지만 나누지 못하고
그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면 결코 풍성한 삶이 아닙니다.
그는 가난한 부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둘째, 자기 아내와 즐겁게 살라.
아내로 번역된 단어는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네 몫'이라고 했기 때문에 아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아내를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배필로 여기는 것이 바로 즐거움의 근원입니다.
지금까지도 자신의 배우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배우자인지 의심한다면
그 삶이 행복하겠습니까?
 
그런 고민과 의심을 버리려면 결혼을 잘 해야 합니다.
외적인 조건을 보고 결혼을 할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아야 합니다.
다 좋은데 믿음만 없다면 그 결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자신이 그 배우자를 변화시키는 소명을 받았다면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순교를 각오할 정도로 어려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셋째, 일을 즐거워하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인해
남자에게 주어진 형벌이 바로 땀을 흘려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의 결과이지만 일은 신성한 것입니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요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일을 통해서 보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함에 있어서 태도는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성직으로 여기고 기쁘게 열심이 합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게 모든 사람에게 24시간을 주셨습니다.
그 시간을 잘 사용하는 사람은 인생의 행복을 누리며 살겠지만
잘못 사용하고, 낭비하는 사람은 언젠가 미래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살아있는 시간은 기회입니다.
이것을 때달으면 결코 주어진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게으름이 죄라고 하셨습니다.
 
미래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오늘이 모여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오늘을 제대로 살지 않으면서 좋은 미래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을 제대로 살지 않으면서 잘되기를 바라니까
거기에 부정 편법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묵상
모든 사람이 죽는데,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여기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으나 안 믿으나 똑 같기에 굳이 예수님을 믿고 힘들게 살 필요가 있는가?
죽음 이후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니까 바르게 살아야 하지 않는가?
자신이 지금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는지, 미움을 받고 있는지 아는가?
자신이 어떤 삶을 살든,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간다고 확신하는가?
무슨 근거로 그런 확신을 가지는가?
살아있는 것이 즐거운가 아니면 고역인가?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지으셨다고 생각하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생을 풍성하게 살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현재 보이는 것들은 죄로 인해 왜곡된 것들임을 아는가?
매일을 최선을 다해 사는가?
하루만 지나도 후회가 되는 삶을 반복적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가?
미래에 대한 꿈을 꾸면서 현재를 헛되게 보내지는 않는가?
주어진 일에 기쁨으로 열심히 하는가?
자신의 배우자를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배필로 믿고 서로 복종하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지만,
죽음 이후에는 이 땅에서 살아왔던 삶에 대한 계수가 있음을 알고
세상에 대해 불평한 할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인생을 즐기려고 애씀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풍성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