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양식
2014년 5월 28일 수요일 - '외모가 아니라 내면이 아름다워야'
유타대학촌교회
2014. 5. 28. 23:58
v.25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v.26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v.27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그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
사무엘하 (2 Samuel) 14장25-27절
'외모가 아니라 내면이 아름다워야'
오늘 QT 본문은 사무엘하 14:25-33절
말씀입니다.
25-27절은 외모가 뛰어난 압살롬에 대하여
28-31절은 요압이 찾아오도록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른 압살롬에
대하여
32-33절은 다윗과 재회하는 압살롬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복 형 암논을 죽이고 외가인 그술에서 3년간 머물다가
요압의 도움으로 다윗에게로 돌아온 압살롬은
2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아버지와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그를 보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우선 압살롬의 외모에 대해 평가를 합니다.
온 이스라엘에서 외모로 압살롬과 비교될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그의 긴 머리카락은 외모 중에서도 가장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는 외모로 자신을 평가하고, 외모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음으로 인해
나중에는 아버지를 향해 반기를 들게 되고
그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머리카락 때문에 죽게 됩니다.
그런 외적인 자랑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은 밝지 못했습니다.
무려 5년 이상이나 아버지 다윗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에 같이 살고 있었지만 마치 지그 반대편에 사는 것처럼
그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으니
그의 마음에 얼마나 서운함과 외로움과 아픔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다시 아버지와 만나기를 원했지만 자신이 직접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데려왔던 요압을 통해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왕자인 자신이 두 번이나 만나자고 했지만
요압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자신을 찾아오도록 요압의 밭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따지러 압살롬에게 나왔습니다.
자신의 재산에 피해를 준 압살롬에게 따지는 요압에게
그는 2가지 목적으로 인해 요압을 만나고자 했음을 말합니다.
1. 왜 요압이 찾아와서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게 했는가?
이렇게 만나지 않으려면 차라리 그술 땅에서 지내는 것이 낫다는
겁니다.
2. 자신이 아버지 다윗을 만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만약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요압은 다윗에게 나가 자초지종을 말했습니다.
그 때야 다윗은 압살롬을 오게 하고 5년이 넘도록 처음 그를 보고
그와 화해의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러나 부자간의 상봉에는 대화가 없었습니다.
또한 뜨거운 화해의 눈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압살롬이 암논을 죽인 것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었습니다.
일시적으로 화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본질은 없는 만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압살롬은 다시 실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 다른 불행으로 나가게 됩니다.
압살롬이 외모는 비록 출중했지만 그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이 외모로 인해 자랑이 되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자랑이 된 것은
아닙니다.
압살롬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중심에는 죄에 대한 회개도 없었고
또한 외모로 인한 교만과 우월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외모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자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외적인 것은 번지르한데 내면이 더럽고 탐욕스러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쓰임받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외모에 시간과 물질을 드립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관심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비싼 옷을 입고, 비싼 가방을 들고, 비싼 차를 몰고, 비싼 집에서
살면
그의 인격이 달라집니까!
사람들이 존경합니까?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칭찬받습니까?
오히려 외적인 것을 꾸미는 사람은
내면의 공허와 추함을 감추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까?
믿음의 사람이든, 믿음의 사람이 모인 교회
공동체든
추구해야 할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 즉
마음입니다.
말씀으로 무장하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본질이 중요하지
크고 화려한 건물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외적인 것에 치중하다 보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합니다.
또한 압살롬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요압의 밭에 불을 질렀습니다.
아무리 목적이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잘못입니다.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공의가
중요합니다.
개인이든 교회든 공의보다 이익을 추구하게 되면 결국에는 더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교회가 좀 더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헌금 액수를
늘리기 위해
복음을 왜곡하고,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 희생과
섬김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다가 보면
당장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서서히 무너지게
됩니다.
성도든 교회든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거룩함을 내세워야 합니다.
공의를 행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것은
아닌지?
요압은 다윗에게 지혜로운 여인을 시켜서 압살롬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가 부하로서 부자지간에 말도 하지 못하고 있기에
좋은 의미로 중재역할을 했는가?
오늘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압살롬을 좋은 목적으로 데려왔다면,
그는 계속해서 다윗에게 압살롬과 화해시키기 위해 애를 썼어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압살롬이 온 후, 발길을 끊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두 번이나 압살롬이 만나자고 했지만 그는 연락도 없었습니다.
왜 그랬는가?
결국 그가 압살롬을 데려온 것은 자기 이익을 위함이었다고 봅니다.
암논이 죽은 후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를 데리고 오면, 그래서 그가 후에 왕이 되면
자기에게도 당연히 이익이 됩니다.
그래서 데리고 왔지만 다윗이 전과는 달리 전혀 관심도 두지 않습니다.
또한 얼굴을 보기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요압은 자기 생각을 접고 압살롬과의 관계도 끊었습니다.
그랬다가 결국 압살롬으로 인해 재산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 역시도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다윗과
압살롬과의 형식적인 재회입니다.
다윗은 그 만남에서 화해의 입맞춤은 했지만
압살롬의 살인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압살롬은 자신이 죄가 있다면 아버지가 죽이는 것도 달게 받겠다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암논을 죽인 것에 대해 죄라고
여기지 않고
정당방위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먼저 자신이 형을 죽인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아버지의 용서를 빌었다면 진정으로 화해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서로가 거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피해갔기에
다윗은 다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압살롬은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게 됩니다.
교회는 개인적인 감정보다 공의를 앞세워야 합니다.
개인적인 감정에 치우치다가 보면 성도들과 세상에 대해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도리어 죄에 대해 무디어지게 되고 불신만 키우게 됩니다.
결국은 더 큰 문제를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거룩함을 지켜야
합니다.
교회는 공의를 행해야
합니다.
교회는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에
충실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세로부터 지금까지 유럽의 거대한 교회들처럼 텅
비어가고
세상을 향해 영향력을 잃게 됩니다.
묵상
무엇을 자랑하고자 하는가?
외적인 것을 위해서는 비싼 돈과 시간을 투자하면서 내적인 정결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가?
사람의 평가가 하나님의 평가와 같다고 생각하는가?
중심을 보시는,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도 보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평가하실 것
같은가?
사람이든 교회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없는가?
잘못된 동기로 어떤 일을 추구하는 것은 없는가?
교회에서 공의가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으로 판단하는 것은 없다고
보는가?
교회가 죄에 대해 분명하게 선포한다고 보는가?
교회가 눈앞에 보이는 이익 때문에 바르게 치리하지 못하고 적당히 넘어가는 것은
없는가?
교회에 헌금을 좀 더 많이 하고, 좀 더 봉사를 한다고 해서 잘못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가?
분명히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익 때문에, 감정 때문에 덮어두는 것은
없는가?
교회가 세상과 달라야 한다면 어떤 면에서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오늘날 세상이 교회를 비판한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보시는
내적인 죄는 감추고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외적인 것만 치장하는 것은
없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거룩함과 공의를 회복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인정받는 진정한 믿음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