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양식
2013년 11월 8일 금요일 - '참 자유인으로 최우선이 되어야 할 것'
유타대학촌교회
2013. 11. 8. 23:49
v.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v.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v.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v.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v.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v.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9장7-12절
'참 자유인으로 최우선이 되어야 할 것'
오늘 QT 본문은 고린도전서 9:1-12절 말씀입니다.
1-2절은 바울의 사도직에 관한 분명한 증거에 대한 말씀이고
3-10절은 바울이 사도로서 누릴 수 있었던 권리에 대한 말씀이고
11-12절은 바울이 복음을 위해 사도로서의 권리를 포기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좀 안다고 연약한 자들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걸림돌이 되었던 자들을 향해 진정한 자유인으로 자신을 예로 듭니다.
심지어 그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며 바울을 비판했는가?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교회의 재정 지원이 없이 사역을 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 바울은 두 가지로 자신을 변호합니다.
첫째, 고린도교회와 성도들이 바로 바울의 사도권을 증거한다.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면, 바울이 세운 고린도교회는 정통성이 없습니다.
그들 또한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니었다면 구원도 없습니다.
바울은 그가 말했던 대로 스승이 아니라 그들을 영적으로 나은 아비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바울에게 사도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 교회 재정은 복음을 위해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교회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바울이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내새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에 대해 바울은 먼저 세상 원리와 말씀에 근거하여 사례의 권리를 말합니다.
군인은 나라로부터 돈을 받고 봉사합니다.
포도원지기는 자신이 수고한 포도원의 소산을 먹고 마십니다.
목자는 자신이 지키고 키우는 양으로부터 젖을 먹습니다.
이것은 일할 사람에게 마땅히 주어지는 보상에 대한 세상적인 상식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율법으로도 섬기는 자들에게 보상을 주라고 했습니다.
근거는 신명기 25:4절 말씀입니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이것은 일을 하는 소가 논이나 밭에 떨어진 곡식을 먹을 권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물며 소에게도 그런 권리가 있는데 사역자에게 그런 권리가 없겠는가?
당연히 사역자인 바울은 수고한 것에 대한 교회의 지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랑할 일인데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사도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으니
얼마다 아쉽고 섭섭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권리를 내세우지 않은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복음 전파였습니다.
영혼 구원이었습니다.
그 본질에 걸림돌이 된다면 바울은 기꺼이 자신의 권리 즉
교회의 재정적인 지원까지도 포기를 했습니다.
바울은 자유인이었지만 실제로는 무보수로 일하는 노예가 된 것은
바로 복음 전파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임을 교회의 교만한 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구약의 십일조의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 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을 위함이었습니다.
레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 가운데 다시 십일조를 드렸고
그 십일조는 아론과 그의 자녀들인 제사장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십일조로 생활한 것은 오직 하나님 일에 전념하라는 의미입니다.
후에 사람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생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전을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됨으로 이스라엘은 더욱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겁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도 땅끝까지 이르러 제자를 삼고, 증인된 삶을 사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 본질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라면 다른 것들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갈수록 본질은 뒤로하고, 비본질적인 일에 전념하는 것을 봅니다.
내적인 영혼의 양식이 아니라 외적인 건물에 치중을 합니다.
선교와 전도와 구제에 대한 예산은 점점 줄어가고 다른 것에 많은 예산을 배정합니다.
마땅히 보장해주어야 할 사역자에 대한 배려는 관심이 없고
자신이 손해보고 희생해야 하는 것만 따집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책임은 말하지 않고 권리만 따집니다.
그러니 그런 교회가 평안하겠습니까?
그런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겠습니까?
교회든 성도든 본질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고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자랑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소명대로 이방인의 사도로 영혼을 구원하는데 all in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의 권리마저 포기하고 tent maker로 일했습니다.
그런 삶에 대해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도가 아니라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묵상
자신은 믿음 안에서 자유인인가?
자신을 구원으로 인도한 사람을 기억하고 배려하는가?
자신의 말과 행동이 말씀에 근거한 정당한 것인가?
권리를 내세우기 전에 책임부터 언급을 하는가?
사역자에 대한 대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사역자의 생활에 대해 교회가 후원을 하고 있는가?
자신은 일한 것에, 공부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데 사역자에 대해서는 어떤가?
하나님께 바른 물질생활이 사역자에 대한 배려임을 아는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교회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고 영혼이 구원받는가?
성도들도 섬김에 대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해 주심을 믿는가?
하나님 앞에 가면 칭찬과 상급받는 삶이라고 생각하는가?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해결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영혼을 위해 자기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겠는가?
기꺼이 삶의 규모를 줄이고, 목표도 수정하겠는가?
이래 저래, 앞뒤 논리도 맞지 않는 비판을 하는 사람은 아닌가?
비판의 목적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나 자신이 손해보지 않기 위함은 아닌가?
자신을 통해 천국에서 만날 사람이 있는가?
십자가를 지는 제자도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성도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본질을 위해서라면, 마지막 날에 주어질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바라고
자신의 자유와 권리와 즐거움을 포기하거나 줄이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는 제자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