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양식

2013년 1월 18일 금요일 - '의인의 실수'

유타대학촌교회 2013. 1. 18. 23:24
v.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v.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v.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v.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v.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v.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v.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v.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창세기 (Genesis) 9장20-27절
 
'의인의 실수'
 
오늘 QT 본문은 창세기 9장18-29절 말씀입니다.
 
18-19절은 아담의 후손들을 통해 생육하고 번성하는 말씀이고
20-23절은 노아가 술 취했다는 것과 아들들의 대처에 대한 말씀이고
24-27절은 노아의 저주와 축복의 반응이고
28-29절은 노아의 죽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읽으면 몇 가지 의아스러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왜 의인 노아가 술이 취했을까?
왜 옷을 벗고 잤을까?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본 것이 무슨 의미인가?
본 것으로 인해 그렇게 저주할 정도인가?
 
차이가 있는 것은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형제들에게 떠들고 이야기를 했지만
다른 두 아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도 않고 덮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함의 후손은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아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리라는 예언을 받았고
반면 허물을 덮었던 셈과 야벳은 창대하리라는 축복의 예언을 받았습니다.
 
허물은 덮어주는 것이 맞습니다.
그 허물을 들추어내고 떠들고 퍼뜨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남을 습관적으로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비판으로 인해 자신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성막 안 지성소에는 언약궤 (ark)가 있습니다.
그 언약궤를 덮는 덮개가 바로 속죄소/시은좌/은혜의 보좌 입니다.
여기에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자신과 이스라엘 모든 죄를 위한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그 속죄소에 뿌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은혜의 보좌 즉 죄가 덮어지는 곳입니다.
 
영원한 의인은 없습니다.
비록 노아가 당대의 의인이었지만 그도 실수했습니다.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죄의 뿌리가 있기에 언제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그런 자신을 알고 늘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누르기 위해, 죄를 이기기 위해 늘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 나아감이 바로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 공경은 신약과 구약 모든 시대를 망라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다른 계명들은 하라, 하지 말라로 끝나지만 부모 공경에는 뒤에 붙어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장수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형통하고 장수하려면 눈에 보이는 육신의 부모부터 잘 섬겨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도 잘 섬깁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님을 잘 섬기고 공경하겠습니까?
 
묵상
자신이 늘 깨지기 쉽고 넘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자각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주의하는가?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 어떤 반응을 하는가?
덮어주는가, 가려주는가, 아니면 떠벌리고 조롱하고 덧붙이며 비판하지는 않는가?
과연 그런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는가?
그것이 공동체의 덕이 되겠는가?
그 사람의 입장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는가?
그것이 가지고 올 결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가?
부모님에 대한 태도는 어떤가?
부모님도 사람인지라 온전하지 못하지만 비방하고 원망하고 떠나는 불효자는 아닌가?
부모공경의 결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부모의 권위을 인정하고 순종하려고 애쓰는가?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 말세의 한 징조임도 기억하는가?
 
오늘 기도에 관한 준비의 말씀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 입니다.
중심구절은 요한복음 16:24절 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에 반드시 시작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혹은
'하나님 아버지'로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기도의 내용을 올려드리고
마지막은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마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면 그 기도는 아무런 가치도, 효력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아무런 관계도 없는 요청이기게 귀를 기울이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때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습니다.
그런 사람이 아닌 사람이 급하다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 기도를 받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믿으시고 백지수표나 신용카드를 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우리의 몫입니다.
주어졌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그것을 주신 분에 대해 걱정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기도는 그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저 원할 때마다 뚝딱 두드리는 도깨비 방망이도 아니고
문지르면 지니가 나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고 묻는 요술램프도 아닙니다.
기도는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 구하는 관계입니다.
쌍방의 대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자녀들이 그렇게 할 줄 믿고 자신의 이름을, 전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누구라도 온전치 못하고,
심지어 자신도 부족한 것이 너무 많은 약하고 악한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께 겸손히 나가 긍휼을 구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특히 가까운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성숙된 믿음의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