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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기도

4월 26 일 새벽기도

사무엘상 20장


다윗은 자신이 무슨 죄 때문에 사울로 부터 쫓겨 다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두렵다고 고백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두둔하는 아들 요나단마저 33절에서 단창을 들어 아들마저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자기의 목숨을 걸고 다윗을 변호합니다. 

그런데 왜 끊임없이 요나단은 다윗을 살려 주려고 했을까요?

13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부친과 함께 하신 것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왕으로서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을 본 겁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이스라엘의 2번째 왕은 자신이 아니라 다윗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윗의 집안과 요나단이 언약을 맺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죽이지 않고 언약을 맺은 또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17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어디서 많이 본 구절아닙니까?

마가복음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이웃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는 이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자만이 할수 있는 모습니다.

요나단은 자신이 왕이 될 자격이 있었지만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에 처한 다윗에게 먼저 언약을 맺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향해서는 계속해서 다윗을 변론해 줍니다.

이런 삶의 자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단코 나올수 없는 모습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열매로 그 사람을 안다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열매는 그 사람의 행동입니다.

사울은 라마나욧에서 성령의 충만을 일시적으로 받았지만 그의 행동이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자기 중심적이고, 여전히 다윗을 향해서는 죽이는 말, 깍아내리는 말을 합니다.

우리들도 사울의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예언을 할 만큼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떤 사람에 대해 험담을 합니다

죽이는 말, 깍아내리는 말을 합니다.

요나단처럼 중간에서 중재하는 말, 화해 시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주일에 교회를 나오지만 교회 밖에서 사람들과 오고가는 대화를 들어보면 여전히 

사울의 모습이 우리속에 남아 있는 것을 봅니다.  

 

34절에 보면 그 부친이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

많은 사람들은 제3자를 욕을하면 같이 욕을 하지 그 욕먹는 사람을 위해서

슬퍼하거나 안타까워 하거나 그 사람을 변론해 주는데 대단히 인색합니다.

우리는 교인들이나 친구가 사람들에게 욕먹을때 그를 향한 슬퍼함이 있습니까? 아니면 같이 욕을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골리앗을 무너뜨린 믿음의 사람, 다윗과 같은 삶을 살게 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다윗을 다윗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하는 요나단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신약에 나오는 인물로 비유하자면 요나단은 침례요한과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흥해야 하겠고 자신은 쇠하여야 하겠다 입니다.

 

요나단이라는 이름의 뜻은 God gives 하나님이 주신다 입니다.

왕의 자리도 하나님이 주셔야 하고, 블레셋과 전쟁을 할때도 승리를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는 

고백을 할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았습니다.

엄청난 업적을 남기지 않은 사람처럼 보여지지만

요나단이 남긴 열매는 다윗이라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살려 낸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요나단의 정신을 가지고 살기를 결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