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v.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v.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v.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v.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게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v.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v.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v.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이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v.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Mark) 9장21-29절
'믿음의 기도가 모든 것의 답이다'
오늘 QT 본문은 마가복음 9:14-29절
말씀입니다.
14-18절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변론하는 제자들에 대하여
19-24절은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25-29절은 오직 믿음의 기도로 세워져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변화 받으사 잠시 원래 모습을 회복하셨을 때
산 밑에서는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로 인해 논쟁이
붙었습니다.
여기서도 서기관들이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서기관들은 아마도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감시하라고 보낸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일행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 따라가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지금도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으로 인해 논쟁이 생겼을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냈을 때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떠들었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이번에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자 또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께서 내려오셨으니 사람들은 놀라며 맞았습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랐을 수도 있고
답이 없이 논쟁하는 가운데 구세주가 등장했으니 반가워서 놀랐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께서 희게 변화된 모습이 남아 있어서 놀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얼굴에 나타나
사람들이 두려워했다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어찌 되었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인해
문제가 해결될 것을 기대하며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논쟁에 대해 들으셨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말씀이 무엇인가?
'믿음이 없는 세대여'였습니다.
그러신 다음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물으셨습니다.
언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때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어려서부터 아들은 귀신에 들렸고
물과 불에 죽을 뻔한 적이 많았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니 그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이나 아팠겠습니까?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그 아버지는 누가 할 수 있다더라는 말만 들으면 데리고 갔습니다.
무슨 약이 좋다더라고 하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어떤 것도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낙심하고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 좀 도와주십시요'
그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결국 아버지가 믿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결국 아버지가 믿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아버지는 즉각 시인합니다.
'맞습니다. 제가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도 없으니
불쌍히 여겨주십시요'
그 진실된 고백을 믿고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향하여
나온 후 다시는 그 아이에게 들어가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귀신이 발악을 하면서 아이에게서 나갔고
아니는 기진맥진 하여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확인도 하지 않고 너무나 쉽게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두 번 죽이는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을 낙심시키는 말입니다.
그저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동체에게 악한
영향력을 끼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오셨을 때 제자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왜 우리들은 능히 귀신을 못 쫓아냈습니까?
분명히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부여받고
병도 고쳤고 귀신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실패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기도 이외는 방법이
없다'
'기도 이외에는 그와 같은 귀신을 쫓아낼 방법이
없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제자들이 전의 경험을 믿고 기도하지 않고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다.
2. 제자들이 믿음으로 하지 않고 의심하면서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다.
왜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열정이 식고, 지속적인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가?
옛날에는, 왕년에는 이라는 말로 과거의 이야기밖에
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런 과거에 매여 날마다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믿음도 흔들립니다.
그러니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의심이 생기고 열정도 식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당시에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은
아닌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누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히 믿음이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책망을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만 사도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자기의 정욕을 위해 구하기
때문에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기도이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기도했다는 자기 만족에
빠집니다.
그러니 외적으로는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믿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인정하지 않으면
믿음이 회복되지 않고, 기도도 응답받지 못합니다.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오니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가 주님 보시기에는 오히려 믿음이 있는 기도라고 봅니다.
지난 주에 했기에, 어제도 했기에 오늘도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선언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사도 야고보는 의심하는 자는 응답받을 줄
생각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중요한 것은 다 압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로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뜻을 정해놓고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또한 기도는 쌍방이기에 올려드렸으면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돈을 들여서 굿을 하여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하는
미신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도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자기의 뜻을 바꾸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안다면 기도는 미신과 같습니다.
믿음의 기도가 문제를 해결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의심한다면 응답은 없습니다.
묵상
자신의 신앙이, 열정이 식었다면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 탓이고, 다른 사람 탓인가?
자신은 무엇을 해왔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기도하고 있는가?
어떻게, 무엇을 기도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가 아니면 원하는 것은 이미 정해놓고 하나님께서 해 주시길
구하는가?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도하면서 의심하는 것은 없는가?
체면 때문에 자신의 믿음 없음을 인정하지 않고 숨기지는 않는가?
쉬지 말고 기도하고,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확인도 하지 않고 말을 너무나 쉽게 하는 것은 없는가?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주님의 말씀이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보는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이 이해가
되는가?
보여지는, 행함이 있는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가?
아프다면, 믿음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면, 그것이 언제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
보았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믿음이 없는 세대요
기도하지 않는 세대가 아닌지
자신부터 돌아보고 믿음이 없음을 고백하고 겸손히
나아감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경험할 뿐만
아니라
식었던 열정도 회복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