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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4년 4월 12일 토요일 - '경계해야 할 가만히 들어온 자들'

v.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v.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v.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v.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v.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Galatians) 2장1-5절
 
'경계해야 할 가만히 들어온 자들'
 
오늘 QT 본문은 갈라디아서 2:1-10절 말씀입니다.
1-2절은 복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한 예루살렘 방문에 대하여
3-5절은 거짓 사람들에게 한시도 복종하지 않음에 대하여
6-10절은 유력한 이들과 함께 복음의 동역자로 인정받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회심한 후 3년 동안은 아라비아에 가 있었고
그 후 14년이 지난 후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문도 사사로운 개인적인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계시를 따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세 번입니다.
첫번째 방문은 회심한 지 삼 년 후에 베드로를 만나기 위함이고 (행 9:26)
두번째 방문은 안디옥 교회의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함이고 (행 11:29-30)
세번째 방문은 제 1차 선교를 다녀온 후 자신의 사역과 사도권을 변호하기 위해
예루살렘 공회에 참석하기 위함입니다.
이 가운데 14년 후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 두번째 방문인지 세번째 방문인지 이견이 있습니다.
저는 세번재 방문이라고 봅니다.
 
올라간 목적이 무엇인가?
자신이 그 동안 전한 복음과 사도들이 예루살렘교회에서 가르친 복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만약 서로 전하는 것이 다르다면
두 종류의 교회가 생겨나게 될 것이고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방문의 결과 예루살렘교회의 기둥이라고 볼 수 있는
사도들 중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으로부터 같다는 검증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요
자신들의 동역자로 인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부탁받은 것이 있다면 구제에 신경을 써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 마저도 이미 바울이 사역을 하면서부터 해왔던 일이기에
문제 될 것은 전혀 없습니다.
 
바울이 왜 구제헌금에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썼는가?
그 이유는 구제를 하는 근본적인 목적도 있지만
구제헌금을 통해 예루살렘교회와 이방인 교회들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럽에 세워진 교회들에게 예루살렘 본 교회가 기근으로 어려우니
구제를 하자고 독려했고 그들은 그들도 어려운 중에
자원하여 기쁨으로 도에 넘치도록 아름다운 예물을 보냈습니다. (고전 16:1-4)
구제는 마땅히 하는 것이지만 바울은 그것을 통해 교회가 하나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늘 마음에 두고 구제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자신이 가르치는 복음과 사도들이 가르치는 복음에 대해 알고자 했는가?
바울이 세운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가짜들 때문이었습니다.
가만히 들어온 사람치고 좋은 목적으로 온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들어와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심지어 바울의 사도권도 부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무엇으로 교회를 흔들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좋지만 할례를 받고 개종하여
율법을 알고 믿어야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은혜로 지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여전히 율법의 노예가 되어 지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함을 보고
그것을 빌미로 오히려 율법의 종이 되도록 하려고 교회에 가만히 들어왔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왔고
사도들 역시 그것은 잘못이라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바울이나 12 사도들이나 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또한 복음은 나눠질 수 없는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세상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기에 세상 모든 죄의 권세를 멸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째 다시 살아나셔서 사마으이 권세도 멸하셨습니다.
누구라도 그 예수님을 믿고 구세주와 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밖에 없는 복음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덧붙여서 할례를 받고 개종하고 율법을 알고 지켜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은혜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후
예수님의 12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받기 위해 애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사역에 있어서는 사도들과 동역할 필요가 있었기에
예루살렘으로 왔고 나누었고 확인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또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바로 유력한 사람들입니다.
문자적으로 본다면 이 말은 세력이 크고 능력이 있어 주변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자 했는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력한 자들은 바로 교회의 영적인 기둥들인 사도들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처럼 권력이나 재물이 많고 세상적으로 유명한 사람들과
사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배설물과도 같았기에 버렸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믿음의 동역자들과 만나서 사역에 대해 논의하고자 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재력이 있고, 공부를 많이하고, 유명한 사람들을 중요시하지만
외모를 중요시하지만
교회에서는 가장 중심이 바로 보이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믿음의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도들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아 교회에서 행했습니다.
 
묵상
갈수록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때에 복음에 대해 제대로 변증해 본 적이 있는가?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본을 받아 행하고 있는가?
교회의 주인이 누구이며 교회의 중심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교회가 세상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모양을 보고 그런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지는 않는가?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이단들이 있는가?
오늘날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이 교회에 들어와 흔들어놓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말씀에 더하거나 빼는 것은 없는가?
외적인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지는 않는가?
교회가 영적으로 깨어 늘 말씀과 기도에 힘쓰고 있는가?
교회가 영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더 치중하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 하루, 종려주일을 앞두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복음을 확실히 알고, 복음으로 무장하고, 영적으로 깨어있는지 점검하고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교회의 유력한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