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25 그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v.26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에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v.27 이게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v.28 그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었으며
그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제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v.29 서로 물어 이르되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가 하고 그들이 캐어물은 후에
이르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v.30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하니
v.31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사시기 (Judges) 6장25-31절
'누가 과연 죽을 자인가?'
오늘 QT 본문은 사사기 6:25-32절 말씀입니다.
25-26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우상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드온에 대한 말씀이고
27-30절은 우상을 제거함으로 위기에 처한 기드온에 대한 말씀이고
31-32절은 아버지의 지혜로 오히려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얻은 기드온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심하고 의심하는 기드온을 찾아오셔서 그를 사사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연약한 믿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사사로 서기 전 한 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사는 동네에 있는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찍어버리고 거기에 제단을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타락입니다.
당연히 이스라엘의 신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겼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실 수 있겠습니까?
소심했던 기드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우상을 제거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안과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서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우상이 없어진 것으로 인해 동네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흥분한 사람들은 누가 우상을 제거했는지 자세하게 조사한 후
결국 기드온이 범인임을 알아냈습니다.
그들이 기드온을 범인으로 찾아낸 후 한 행동이 무엇인가?
그가 살고 있는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 집에 가서 마땅히 죽을 자니 끌어내라는 겁니다.
누가 마땅히 죽을 자입니까?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주민들입니까?
아니면 그 우상을 찍어 없애버린 기드온입니까?
사람이 우상에 눈이 멀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어떤 존재입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과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자신들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최소한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부족하지만 그렇게 살려고 애써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사기의 가장 중심구절과 같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좋은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 뜻인가 자기 뜻인가?
본질인가 비본질인가?
진리인가 거짓인가?
믿음의 사람이라면, 믿음의 공동체라면 이런 문제부터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우상에 눈이 멀면,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객관성도 없고, 상식도 통하지 않고 오직 더러운 욕망에 사로잡혀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런 모습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보여지고 있기에 세상으로부터 비판을 받습니다.
비록 우상을 섬겼던 아버지지만 아버지는 지혜로운 사람이였고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바알이 진짜 신이라면, 자신의 신상을 파괴한 그 범인을 그냥 내버려 두겠느냐?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겁니다.
그 아버지로 인해 바알은 별명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것은 여룹바알 즉 '바알리 직접 그와 싸우게 하라'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후에는 그 부름에, 소명에 합당한 행함이 요구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사사라는 큰 직분을 감당하기 전에 그에 합당한 믿음이 있는가 하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의 영적인 리더가 되기 위해서도 행함이 요구 됩니다.
침례교의 안수 집사나 장로교의 장로가 되려면 훈련을 받고 검증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기 꺼려하는 힘든 섬김부터 시작하여 선교를 다녀온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어떤 교회에서는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있습니다.
가서 보고 배우라는 겁니다.
좁은 틀을 깨뜨리고 객관성을 보라는 겁니다.
그런 과정을 최소한 6개월에서 1년을 한 후에, 검증되면 직분을 줍니다.
(말씀의 훈련을 받고 기도에 힘쓰고 물질생활을 잘 하는 것은 기본)
그리고 그 행함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진리대로 행하면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와 같은 말을 합니다.
잘 난 척 한다, 건방지다.
혼자 그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세상적으로는 윗 사람 눈에 잘못보여서 진급이 늦을 수 있습니다.
불이익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진리는 드러나고 진리는 승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악은 심판하십니다.
그러니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진리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할 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믿음이 있다면 기드온의 아버지와 같은 지혜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자신도 우상을 섬겨왔지만, 정말로 그 우상이 신이라면
그 신이 처벌하도록 하자는 겁니다.
그는 아들로 인해 우상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욕망에 사로잡혀 눈이 먼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누가 죽어야 마땅한 사람입니까?
우상을 허문 기드온입니까 아니면 우상을 섬겼던 주민들입니까?
그러나 영적으로 타락한 오늘날도 그 때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일어나고 있습니다.
본질과는 달라도 다수로, 힘으로 밀어부칩니다.
상식도 통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기준이 아니라, 진리가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이익이 기준입니다.
중세 암흑시대처럼 직분이 돈으로 얼룩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것과 상관없이 세상적인 위치로 주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이 리더가 되니 결국 그런 사람들로 인해 문제가 생기고 비난을 받습니다.
기드온,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 그리고 마을 주민들.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묵상
무너뜨려야 할 우상은 무엇인가?
하나님 중심인가 다른 것이 중심인가?
말씀이 기준인가 세상이 기준인가?
하나님 뜻인가 자기 뜻인가?
진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집으로, 감정으로, 다수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없는가?
하나님의 일을 진리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으로 해결하는 것은 아닌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 어떻게 하는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 다수결로 해결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부터 하는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손해나 위기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오해받고 말 듣는 것이 싫어서 그냥 넘어가는 것은 없는가?
아닌 줄 알면서도, 권위에 눌려서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은 없는가?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두려워서 하지 못하는 것은 없는가?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심을 믿고 순종하는가?
자신 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가?
자신이 직분자로 바르게 행하려고 애쓰는가?
교회의 영적인 리더들이 진리에 따라 바르게 순종하고 있다고 보는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욕을 먹는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비록 연약하고 소심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진리라면
위험이 오고, 손해를 본다고 할지라도 최후 승리를 믿고 묵묵히 순종하는
믿음의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