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하니라.
v.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v.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v.4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v.5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v.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v.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창세기 (Genesis) 38장1-7절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가까이 하는 삶에 대한
경고'
오늘 QT 본문은 창세기 38:1-11절
말씀입니다.
1-5절은 유다의 결혼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말씀이고
6절은 유다의 큰 며느리 다말에 대한 말씀이고
7-10절은 유다의 두 아들들의 죽음에 대한 말씀이고
11절은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보낸 유다에 대한 말씀입니다.
창세기 38장은 없어도 문맥상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37장과 그후 39장은 모두 요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가운데 유다에 대한 말씀이 끼어있습니다.
그 말은 지금은 요셉이 야곱으로부터 장자권을 넘겨 받지만
앞으로는 유다가 가문의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먼 훗날 유다 지파에서 예수 그리스도 즉 메시아가 탄생합니다.
중요하게 볼 단어들이 몇 개 있습니다.
1. 유다가 형제들을
떠났다.
왜 그가 형제들이 있는 곳을 떠났는지 모릅니다.
세겜-> 도단-> 다시 야곱이 있는 헤브론으로 왔다가 다시
떠났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기에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날마다 요셉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고 낙심하는 아버지를 보며 죄책감을
느꼈기에.
그러면서도 요셉이 죽지 않았다는 말을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요셉에 대해 팔자고 하기 보다 살려주자, 풀어주자고 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2.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워졌다.
아둘람은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입니다.
결국 가나안 사람입니다.
가나안은 그들이 멸해야 하는 약속의 땅입니다.
그런데 거기 사람과 친해졌습니다.
그 사람을 알려면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친구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친구를 자신들의 잣대로 너무 제한하거나
너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잘못되면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하나님과 멀어지면 세상과는
가까워집니다.
3. 가나안 여인을 보고 동거하기
시작했다.
야곱의 딸 디나가 가나안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가 결국 봉변을
당했습니다.
그런 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가나안 여인을 보고 동거하게 됩니다.
결혼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부모 형제 친구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배우자를 정해주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자신이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배우자를 택할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 형제를 떠나 세상과 친하게 살던 유다는 결혼도 없이 바로
동거합니다.
그리고 자녀를 낳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신부감을 위해 고향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삭은 장남 에서가 가나안 여인을 데리고 왔을 때 근심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친척 라반의 딸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야곱의 동의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배우자를 결정하고 동거하기 시작했습니다.
4.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셨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그냥 두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노아의 때에 홍수로 세상을 멸하셨습니다.
또한 아브라함 때에는 소돔을 유황불로 멸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일로 인해 애굽 왕 바로의 가정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아비멜렉에게는 경고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직접 죽이신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장자 엘은 죽이셨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큰 악을 행했는가?
그 악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기에 모릅니다.
5. 형제간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오난도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다.
형제간의 대를 이어주는 것은 이 때에는 아직 법으로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훗날 모세 때에 그 법이 정식으로 주어집니다. (계대결혼 신명기
25:5-10절)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대를 잇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형이 자녀가 없이 죽는 경우 동생이 형수와 동침하여 자녀를 낳게 한다.
그렇다고 계속 같이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난은 아버지의 명령도, 관습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만약 자신을 통해 형수가 아들을 낳게 되는 경우
형의 유산이 자신에게 오지 않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손해가 될 것을 짐작하고 자신의 씨를 형수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설정)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하기에 그도 죽이셨습니다.
이 오난에서 영어의 onanism이 생겼습니다.
왜 유다의 집에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 비극은 유다의 행동과 그가 형제들을 떠남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가 부모 형제를 떠나 세상과 가까워졌기에 생겼습니다.
죄가 점점 퍼지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과 가정이 흔들리는 것도 봅니다.
부모의 역할도 봅니다.
유다가 떠나가도록, 유다가 동거를 하도록, 아버지 야곱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여전히 죽었다고 여기는 요셉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슬퍼하고 낙심만 하고 있었는가?
그러는 사이에 다른 자녀들은 어떻게 되는지 관심도 없었는가?
묵상
자신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가 아니면 멀어지고 있는가?
세상과는 가까이 가지 않는가?
자신이 자주 만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
자신이 자주 가는 곳은 어디인가? 믿음의 모임인가 아니면 먹고 마시는 곳인가?
자신이 자주 나누는 대화는 무엇인가? 말씀과 은혜인가 아니면 세상적인 이야기인가?
자신이 주변에 어떤 영향력을 주는가?
하나님께서 죄와 악을 미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어떻게 여기는가?
그 분을 경외 즉 두려워함이 있는가?
그 분이 모든 것을 보시고 알고 계시다고 생각하면서 그 분 앞에서 습관적으로 짓는 죄는 없는가
그저 필요할 때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와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바라는 형식적인 삶은 아닌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는가?
특권을 말하기 전에 책임과 의무를 다 하는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건간을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 나라와 의에 대해, 교회에 대해, 관심이 있고 섬김이 있는가?
이웃을 돌아보고 구제함이 있는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하는 것이 있는가?
부모로서 자녀들의 친구들과 행동에 관심이 있는가?
자녀로서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함이 있는가?
배우자에 대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결혼도 하지 않고 동거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하다고 여기는가?
하나님은 고사하고 부모님이 보시기에 자신의 삶이 칭찬받을 만한가?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아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이 하나님과는 점점 멀어지고
대신 세상과는 점점 가까워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세상 풍습을 따라감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고 돌이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회복의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