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 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v.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v.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v.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v.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v.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창세기 (Genesis) 18장10-15절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오늘 QT 본문은 창세기 18장1-15절
말씀입니다.
1-8절까지는 하나님과 천사들을 극진히 대접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에 관한
말씀이고
9-15절까지는 다시 한 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에 대한 사라의 반응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하나님과 천사들을 지극히
대접했습니다.
식사를 하시는 동안 마치 종처럼 서서 대기하는 모습이 얼마나 진지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대접하는 모습은 바로 예배자의 모습과
같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기쁨으로 드리는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종으로 여기고 섬기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고
자원하여 넘치도록 기쁨으로 예물을 준비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하나님께 합당한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요
지금도 그런 예배자를 찾고 계시고, 그런 예배자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져
갑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예배자였습니다.
13년 동안 침묵하셨다가 다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직접 오셔서 그 약속을 확인하며 말씀하십니다.
사라가 들었지만 그녀도 아브라함처럼 웃었습니다.
이 웃음은 결코 긍정적인 웃음이 아니라 불신의, 비웃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속으로 웃은 사실을 아시고 질문하셨습니다.
'왜 웃느냐?'
그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불가능한 일이 있겠느냐?'
'내게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자주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
없네
우리의 모든 간구, 모든 생각, 꿈과 소망도 아시는
분
우리의 모든 괴로움 바꿀 수
있네
불가능한 일 행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니
그를 이길 자 아무도
없네'
이런 찬송을 부르면서도 얼마나 의심하는지요?
얼마나 인간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웃는지요?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예배자로 살지 못하면서도 안 그런 척 하는지요?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 네가 내 약속을 믿지 않고
웃느냐?'
'나는 전능하신 (엘 샤다이)
하나님이다!'
묵상
지극히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은
아닌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 주인인지 아니면 종인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어떤지?
가장 귀한 것을 기쁨으로 즐거이 드리는지 아니면 인색함으로 아까워서 못
드리는지?
체면 때문에, 믿음이 있는 척, 온전한 예물을 드리는 척, 거룩한 척 하는 위선은
없는지?
하나님께서 '왜 웃느냐?;고 질문하신다면 무엇이라고 반응할 것인지?
오늘 기도에 관한 말씀은 '야베스의
기도' 입니다.
중심 구절은 역대상
4:10절 말씀입니다.
'고통' 이라는 의미의 야베스는 그의 아픔을 하나님께 기도로
승화시켰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을 하셨습니다.
그가 구했던 것은 네 가지
기도였습니다.
1.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기를
2. 내 영토/지경이 넓어지기를
3. 주님의 손을 나에게 펼쳐주시기를
4. 불행을 막아 주시기를
야베스의 기도는 언뜻 보면 기복적인 기도인 것처럼 보입니다.
복에 복, 땅과 같은 제목이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복은 하나님을 아는 신령한 은혜의 복입니다.
영토/지경은 부동산이 많아지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기도한 겁니다.
만약 지극히 세속적으로 그저 땅이 많아지기를, 부하기를 기도했다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겠습니까?
야베스가 드린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선언했던 것처럼 자신의 정욕을 위한 기도였다면 응답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 신령한 은혜를 구하는 기도.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응답하시는 기도입니다.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네가 왜 약속을 믿지 못하고
웃느냐?'고 질문하신다면
뭐라고 답할 것인지,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고
'믿음이 없음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고백하며 겸손히
엎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를
체험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