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v.27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v.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v.28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v.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v.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v.32 데라는 나이가 이백 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세기 (Genesis) 11장26-32절
'미래와 희망의 족보'
오늘 QT 본문은 창세기 11장10-32절 말씀입니다.
또 재미없는 족보가 나오지만 5장의 족보와는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장에 나오는 족보의 반복되는 구절은 ~낳고, 살다가, 죽었더라 입니다.
그러나 11장에 나오는 족보에는 죽었더라는 말이 없습니다.
물론 이 족보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들 가운데 셈의 자손들도 다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미래의 희망에 초점을 맞춘,
하나님의 알 수 없는 섭리를 바라보게 하는 족보입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사람들이 나뉘어졌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멈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 가운데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족보 가운데 데라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의 후손 가운데 아브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은 바로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팔던 데라의 아들입니다.
하필이면 왜 그런 사람의 아들을 사용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여호수아 24:2절)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우리의 권한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도들 가운데 대부분은 잘 배우지 못했고 성깔이 있었던 어부 출신들입니다.
수많은 교회를 개척했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던 사울은 살인자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원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부르시고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여인들 역시 평범한 여인들은 아니었습니다. (다말, 라합, 룻, 밧세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것도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릅니다. (이사야서 55:8-9절)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모든 죄인들 가운데에서 그래도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아담-> 셋-> 노아-> 셈-> 아브라함
하나님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십니다.
지금도 일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그 분의 약속은 유효합니다.
그 약속을 믿고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고 언젠가 그 약속의 성취를 볼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우리의 삶을 앞으로 나가게 하고 소망을 갖게 합니다.
데라가 왜 갈대아 우르를 떠났을까?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미련이 없어서?
아니면 아브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 때문에? (아들 때문에?)
아니면 자신의 생각으로?
왜 하필이면 가나안으로 목표를 세웠을까?
데라는 가나안이 목표였는데 왜 하란에서 머물렀을까?
죽은 아들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하란이 우상을 만들어 팔기에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사업상)
하란이 편한 곳이었 때문에?
왜 데라가 목표였던 가나안을 향해 가지 않고 하란에 머물렀는지는 모르지만
데라는 하란에 머물렀고 결국 거기서 죽었습니다.
목표가 있으면 목표를 향해서 가야 합니다.
가다가 힘들다고, 가다가 좋아보이는 곳이 있다고, 가다가 실패했다고 머무르면 안 됩니다.
그 목표가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라면 편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일어나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보지도 못하고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가다가 중단하면 아니간만 못하다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9:62절)
성경에는 떠라라, 가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것을 봅니다.
편함은 하나님의 목표를 방해합니다.
편함은 믿음을 방해합니다.
편함은 사람을 주저앉게 하고 머무르게 합니다.
편함은 사람을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게으르게 합니다.
편함은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 그저 좋은 것에 만족케 합니다.
깨어야 합니다.
일어나 가야 합니다.
실패도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도 두려워말고 일어서서 가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가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를 향해 나아가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했던 갈렙과 같은 믿음과 도전이 필요합니다.
묵상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는가?
그 소망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막연히 자신에게서 온 것인가 아니면 약속의 말씀에서 온 것인가?
인생의 목표가 있는가?
여러 가지 이유로 그 목표를 포기하지는 않았는가?
편한 곳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타성은 없는가?
오늘부터는 기도의 생활에 대한 말씀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 입니다.
관련된 말씀은 창세기 3:8절 말씀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는 하나님과 에덴 동산에서 거닐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서는 그 시간에 오히려 숨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숨은 것을 아시고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에 대한 거룩한 부담이 있습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입니다.
동산을 거닐면서 사업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아무런 대화도 없이 그냥 거닐었겠습니까?
일상적인 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는 쌍방의 대화입니다.
형식적이지 않고 진솔한 삶을 나누는 겁니다.
숨김이 없는 진실된 대화입니다.
왜 우리가 기도의 부담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가?
죄 때문이 아닌가?
부족함이 없어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 없어서인가?
기도해도 금방 응답이 없어서인가?
기도는 헛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귀찮고 게을러서인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도 없고,
미래에 대한 소망도 없습니다.
도전적이고 진취적이지 못하고 그저 그런 삶밖에 못 삽니다.
편한 것에 쉽게 안주하여 변화와 발전이 없습니다.
실패하면 쉽게 무너져 일어서지 못합니다.
대화가 없으니 외롭고 쓸쓸하고 자신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삶에 목표가 있는지, 그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아니면 편한 곳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하나님께 나가 편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다시 일어나 목표를 향해 힘차게 앞으로 가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알림>
금년 교회 목표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질화하는 해' 입니다.
인사는 '오늘 QT 하셨습니까?' 입니다.
개인의 삶에, 그리고 어떤 모임이든 그날의 QT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40일 기도에 대한 특별새벽기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화요 캠퍼스 모임이 u of u union cafeteria에서 있습니다.
화요일 8시에는 기도 모임이 있습니다.
화요일 6:30분에는 알파코스가 있습니다.
수요일 8시에는 리더 모임이 있습니다.
목요일 7시에는 교회연합 중보기도 모임이 제일장로교회에서 있습니다.
금요일 7시에는 경배와 찬양 예배가 있고 이어 청년부 소그룹 모임이 있습니다.
토요일 7시에도 특별새벽기도가 있습니다.
금주의 암송구절은 야고보서 1장2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다가오는 주일에는 북한 어린이들을 위한 페니를 모읍니다.
다 채워지지 않았더라도 가지고 오셔서 빈 저금통으로 바꾸어 가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매달 마지막 주일에는 목장 모임을 합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그 날을 사모하며 QT로 준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