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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4년 1월 11일 토요일 - '요나서를 통해서 보는 요 - 나의 모습'

v.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v.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v.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v.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2: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3: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 길이라.
4: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 (Jonah)
 
'요나 선지자를 통해서 보는 요 - 나의 모습'
 
요나 선지자는 실제적인 인물로 예수님께서도 인용하셨습니다. (눅 11:30절)
또한 구약에서 그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왕하 14:25절)
그는 여로보암 2세 때 북 이스라엘에 살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떤 부름인가?
니느웨로 가서 (앗수르의 수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부름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반대로 도망갔습니다.
다시스는 지금의 스페인에 있는 곳으로 팔레스타인에서 무려 3,200km나 떨어진 곳입니다.
 
1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도망하는 요나
2장은 고난 속에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요나
3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요나
4장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주저 앉은 요나
 
하나님께서 요나의 불순종에 다른 사람을 택하셨더라면 요나서는 1장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불순종하는 요나를 따라가셔서 다시 부르셨습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우리도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싫다고 요리조리 도망다녔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회를 주셨기에 현재까지 살아있지 않습니까?
 
요나는 어려움 속에서 그래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큰 어려움이 왔으니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불순종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모습.
그러나 많은 경우 핑계를 대고, 변명하고,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더 꼬입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부흥이 뒤따릅니다.
요나가 책임을 지고 바다에 던져지자 하나님을 모르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부흥입니다.
 
요나를 삼켰던 물고기가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물고기가 얼마나 위대한 물고기인가가 중요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기도했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말을 합니다.
'요나에게 있어서 이 물고기는 가장 위대한 신학대학이었다'
'요나가 토함받은 날은 요나가 물고기 신학대학을 졸업하는 날이었다'
 
그 후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원수의 나라 앗수르로 가서 니느웨에서 외쳤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메시지였습니다.
놀랍게도 니느웨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요나는 그게 싫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용서하실 바에는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4:3절)
그런 다음 성에서 나가 성 동편에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가를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외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그 사역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그리고는 일꾼에서 한 순간 방관자가 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그런 모습을 봅니다.
열심을 냈지만 힘이 들고 자기를 알아주지도 않으면 화를 냅니다.
왜 자신만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은 일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하던 일을 그만 둡니다.
더 나아가 불평 불만 원망 그리고 비판의 목소리도 높입니다.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을 하고 심지어 교회를 떠나겠다고 협박도 합니다.
 
무엇을 위해 섬깁니까?
하나님의 영광인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릅니다.
자기 화가 풀릴 때까지 마치 요나처럼 화를 내고 심통을 부리고
교회 공동체를 시끄럽게 합니다.
그게 진정한 일꾼의 모습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런 사실을 알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다시 사용하십니다.
그렇지만 인정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으면 돌이킬 때까지 풍랑을 준비하십니다.
그렇게 해도 되지 않으면 로마서 1장에 나오는 것처럼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그게 제일 무서운 심판입니다.
 
전 세계 70억 인구 가운데
우리가 선택받은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렇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교사로 부름받았습니다. (제자 삼으로, 증인되라)
그런데 방관자로, 관광객으로 지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주의 자녀들을 부르십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는 우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곳으로 부르실지 모릅니다.
거기만 빼고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기부터 하라고 하실 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나처럼 도망가면, 시간과 물질만 낭비할 뿐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자신을 죽이고 순종하는 것이 복입니다.
 
요나 선지자를 통해서 보는 요 - 나의 모습은?
말씀에 불순종하여 도망하는 모습
일어나 가서 외치라는데 가만 앉아서 외치지도 않는 모습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가장 쓰시기 어려운 사람인가?
    바로 요나와 같이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입니다.
    자기 철학, 자기 경험, 자기 주관, 자기 고집, 자기 생각이 꽉 찬 사람은 쓰지 못합니다.
    깨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잠을 자는 모습
선교사로 부름받았는데 관광객으로 지내고자 하는 모습
멀리 가면, 혼자 있으면 하나님께서 모르신다고 생각하는 모습
    범죄 현장에도, 방탕하는 현장에도, 음모를 꾸미는 현장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어려움을 당해서야 기도하는 모습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절대로 기도하지 않다가 어려움이 오면 기도하는 모습
    하나님은 우리를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풍랑도, 물고기도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평하는 모습
    니느웨 만큼은 용서받아서는 않되는데 그들을 용서하셨다고 화를 냄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자기 생각대로 사는 모습
하나님의 크신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모습
    아무 것도 아닌 박넝쿨도 아끼는데 니느웨에는 구원받아야 할 사람 120,000을 생각지 못함
자신과 불편한 관계에 있거나 괴롭힌 사람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기 꺼려하는 모습
    그런 사람은 니느웨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김
 
오늘 하루, 요나서를 묵상하면서 자신의 모습이 바로 요나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고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