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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3년 12월 3일 화요일 - '교회 공동체의 문제'

v.6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v.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v.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v.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고린도후서 (2 Corinthians) 2장6-9절
 
'교회 공동체의 문제'
 
오늘 QT 본문은 고린도후서 1:23-2:11절 말씀입니다.
1:23-2:4절은 사랑에 근거한 책망에 대하여
2:5-6절은 합당한 징계에 대하여
7-11절은 회개한 자를 향한 사랑과 용서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쓴 편지가 몇 개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쓰기 전에 먼저 몇 가지 문제에 대해 편지를 보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썼고
그 다음에는 눈물로 쓴 고통의 편지가 있고
그 다음에 고린도후서를 썼습니다.
 
왜 고통의 편지와 후서를 썼는가?
그것은 고린도교회에 대한 문제를 듣고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6:4-5절을 보면 바울이 마게도냐로 갔다가
고린도교회로 가겠다고 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 한 번 고린도에 갔다가 큰 고통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고 겪은 고통이 어떤 것인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쓴 바울의 권고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 중의 일부는 사도 바울의 사도권마저 의심하고 부인하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또 다시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여 근심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대신 편지를 쓰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고린도후서 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고린도교회에 눈물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만큼 그는 고린도교회가 바로 서기를 원했습니다.
교회 안에 분쟁, 음행, 소송, 우상숭배, 그릇된 부활사상, 은사 문제, 성만찬에서의 문제,
그리고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의심과 부정 등.
이런 많은 문제들을 언급하며 편지를 쓴 것이 즐거웠겠습니까?
그런 편지를 쓰는 것이 너무 힘들어 자신이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그런 고통의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몸 된 교회가 바로 서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의 마음이 전달되어 고린도교회는
교회의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을 징계했습니다. (6절)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교회 전체를 어지럽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만 있어도 물은 너무나 쉽게 흙탕물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죄는 너무나 쉽게 오염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문제가 있지만 바로 잡아야 합니다.
죄가 누룩과 같이 퍼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첫째, 징계를 해야 합니다.
그저 좋은게 좋은 거라는 말로 죄에 대해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둘째, 회개한 사람은 사랑으로 용서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용서와 화해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죄로 인한 상처는 쉽게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회복과 화목과 건강한 성장을 주십니다.
 
오늘날 이슈 가운데 하나가 바로 healing 입니다.
한 때는 부흥과 비전이라는 말이 안 들어가면 이상했듯이
요즘은 healing이라는 말이 안 들어가면 인기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방송에서 나오는 healing이 진정한 healing인가?
지식적인 방법으로 되는 것인가?
진정한 healing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사랑으로 용서할 때 이루어집니다.
 
자신의 마음에 분노와 복수를 간직하면서
자신의 잘못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치유는 없습니다.
 
치유는 자신이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은 것을 알 때
그런 사랑으로 용서할 때
시작이 됩니다.
 
징계는 벌을 주는 것에서 끝나면 상처를 줍니다.
부모가 자녀를, 선생님이 제자를 징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징계가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상처를 주지 않고 회복이 됩니다.
잘못을 알고 떠나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모든 것의 바탕은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어렵습니다.
 
마귀는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마귀는 용서를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싸우라고, 용서하지 말라고 부추깁니다.
그래서 다툼과 분쟁이 있고 원수처럼 지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는 모든 바탕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 위에 징계가 있고 그런 후에는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묵상
사람을 세우기 위해 책망한 적이 있는가?
책망에 편견은 없었는가?
약한 사람에게는 강하게 하면서도 강하고 윗 사람에게는 말도 못하지는 않았는가?
그런 책망을 할 때 최소한 그것에 대해 자신은 떳떳한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에 근거하야 책망을 했는가?
교회 안에서의 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좋은게 좋은 거니 그냥 넘어가야 하는가?
그렇게 했을 때 더 이상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가?
오히려 덮어둔 것으로 인해 더 많은 말과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는가?
죄가 전염되고 오염시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교회에 징계가 있었는가?
징계한 후 회개한 사람에 대해 용서하고 다시 사랑으로 받아주었는가?
아직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없는가?
징계의 시작이 사랑으로 시작했는가?
징계가 잘못된 편견이나 선입관이나 무시함으로 시작된 것은 아닌가?
자신은 어떤 사람이라고 보는가?
자신도 죄인이었고 죄인이지만 용서받은 죄인임을 늘 자각하고 지내는가?
그런 용서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려고 애쓰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을 포함하여 죄인인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늘 문제가 있음을 알고 바로 잡되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으로 함으로
상처가 오히려 전보다 더 화목하고 건강한 공동체를 세워가는데 앞장서는
평화의 사도로 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