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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3년 10월 26일 토요일 - 'kidadult'

v.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v.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v.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한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v.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v.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v.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v.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v.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 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v.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3장1-9절
 
'kidadult'
 
오늘 QT  본문은 고린도전서 3:1-9절 말씀입니다.
1-4절은 교회에서 사역자로 인해 생긴 파벌에 대해 육신에 속한 자와 같다는 말씀이고
5-7절은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각각 은사대로 섬기는 사람임에 대한 말씀이고
8-9절은 교회의 지체들은 모두가 동역자들요 언젠가는 각자 섬긴대로 상급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 생긴 분쟁에 대해 좀 더 강하게 언급을 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을 보니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요
영적인 어린아이와 같다는 겁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고 1년 반 동안 거기에 머무르며 가르쳤습니다.
그런 후 그곳을 떠나 에베소로 왔고 잠시 머문 후 다시 안디옥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잠시 머문 후 다시 3차 전도를 떠났고 그 다음에는 에베소에서 2년 반 이상을 머물렀습니다.
바울이 아마도 에베소에 머물고 있는 동안 고린도교회의 분쟁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바울은 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이 바로 고린도전서와 후서입니다.
지금은 없지만 그 외에 두 번의 편지가 더 있습니다.
눈물로 쓴 편지가 있고 그 중간에, 아니면 먼저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교회를 개척한지
최소한 2년 이상은 지났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 때나 지금이나
아직도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책망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중에 시기와 질투로 파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와 같다는 말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순수하고, 부모의 보호와 사랑과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면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함께 지낼 때, 자기 것을 엄청 챙깁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입에서 자주 듣는 말은 '이거 내꺼야'라는 말입니다.
또 누가 무엇을 가지고 있으면 쉽게 가까이 가고
자신보다 더 나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시기합니다.
또 쉽게 삐치고 싸웁니다.
그러면 부모님들이 서로 사이좋게 나누라고 중재를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뉜 그들의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한 수준이라는 겁니다.
이제는 시간이 지났으니 영적으로 자라야 하는데 아직도 처음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추종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해 알려줍니다.
바울이든 아볼로든 모두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다.
사역자라는 말은 '디아코니아'로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종이 주인의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것이 바로 이 단어의 의미입니다.
또한 이 단어에서 deacon 즉 집사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니 집사는, 사역자는 종처럼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바울이든 아볼로든 각각 하나님께서 주신 다른 은사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심었다는 의미는 복음을 뿌리고 믿음을 갖게 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아볼로가 물을 주었다는 의미는 그가 말씀으로 사람들을 양육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이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뿐입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이 섬긴 대로, 행한 대로 상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 상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받을 수도 있고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바울이든 아볼로든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은 동일한 일을 하라고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를 주시고 다른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런 다름 때문에 다양한 사역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짧은 구절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교회 안에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육체에 속한 사람들이 있다.
모태교인도 있고, 믿은 지 몇 십 년이 된 사람들이지만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훈련도 받지 않아 믿을 때 그 모습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로 인해 교회에는 분쟁이 생깁니다.
자신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비교하면서 시기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여러 가지 풍성한 것으로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는 그들은 유치한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파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아무리 모태교인이든, 몇 십 년 신앙생활을 했든 말씀을 보지 않고 배우지 않으면
kidadult와 같습니다.
이 말은 kid와 adult를 합한 말로 직역하면 '애어른'이라는 뜻입니다.
의역을 하면 연수로는 어른인데 영적 수준은 아이수준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이 자라고 성숙해야 하는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니
사역은 하지 않고 문제만 일으킵니다.
 
2. 교회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
자신이 교회의 머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인해 교회는 항상 시끄럽습니다.
자신이 교회를 세웠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려고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시고 성도는 그 머리에 붙은 지체들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사람이 교회의 주인이 되어 분쟁이 생깁니다.
 
3. 교회 부흥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사람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섬기는 사람이 있기에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니 자신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결국 자신이 한 것처럼 착각하고 교만하게 됩니다.
 
4. 은사는, 사역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사람들에게 똑 같은 은사를 주시고 똑 같은 일을 하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일밖에 못합니다.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역, 섬기는 사역, 찬양하는 사역, 악기로 섬기는 사역, 기도하는 사역,
치유하는 사역, 위로하는 사역, 예언하는 사역, 나누는 사역, 전도하는 사역 등등
그렇기 때문에 비교하면 안 됩니다.
사람을 비교해서도 안 되고, 사역을 비교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작품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5. 상은 있다.
히 11:6절에도 있듯이 이 땅에서의 섬김에 대한 보상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땅에서 받고 어떤 분들은 하나님 앞에 가서 받습니다.
보상을 바라고 섬기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시고 상을 주십니다.
 
그 상의 기준은 맡은 일에 대한 충성입니다.
많이 맡긴 사람에게는 많이 찾으시고, 적게 맡긴 사람에게는 적게 찾으십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뿌린 대로 거둡니다.
뿌리지 않고 거두는, 공짜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사람이 보기에 많은 일을 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는 전혀 아닐 수 있습니다.
그 일의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다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를 위했는지, 아니면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
그 예가 바로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둘 다 같은 일을 했지만 양에 대해서는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지만 인정하셨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염소가 한 일에 대해서는 그들이 기억하고 주장하지만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동기도 알 수 없고,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냈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기에
하나님 앞에 가면 받을 것이 없습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을 기억하면 됩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면 됩니다.
그 분은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기에 공평하게 보상하실 것입니다.
 
6. 사람을 추종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 분이 구원을 허락하셨고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생명의 빚을 졌습니다.
또한 그 분이 이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입니다.
그러면 그 분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 분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 대신 사람을 바라보면 결국 타락하게 되고, 파벌이 생기게 됩니다.
 
묵상
자신의 영적 수준은 어디인가?
신앙생활을 몇 년 했는지, 거기에 비례하여 영적으로 자랐는가?
말씀의 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가?
말씀의 훈련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신앙이 자랐는가?
아는 것은 많은데 삶에 변화는 없는 것은 아닌가?
자신이 신령하다고 즉 영의 사람으로 여기는가 아니면 육에 속한 사람으로 여기는가?
사람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가 다름을 아는가?
사람을 추종하고, 비교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파를 만든다면 신령한 사람이라 볼 수 있는가?
교회 지체들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가?
은사도, 직분도 다르기에 비교할 수 없는데,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고 비판하지는 않는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상이 있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상급의 기준이 무엇이라고 여기는가?
하나님의 기준은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임을 아는가?
하나님의 기준은 양이 아니라 비율임을 (%) 아는가?
뿌리지 않고 거두려고 하는 것은 없는가?
상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닌가?
바라지 않고 충성스럽게 섬길 때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심을 믿는가?
교회의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 여기는가?
자신이 교회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필요 없는 지체가 없는 것처럼 모두가 주어진 은사대로 지체의 역할을 하는가?
외모, 소유, 지위, 재능 등을 시샘하는 것은 없는가?
사람들이 자신이 한 모든 것을 알고, 칭찬해주기를 원하지는 않는가?
힘들여 섬겼지만 알아주지 않아, 힘들다고 여긴 적은 없는가?
오히려 하나님 앞에 큰 상이 될 것이라고 여기고 묵묵히 일하는가?
하나님 보다 사람을 더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닌가?
 
오늘 하루, 거룩한 성일을 앞두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다른 지체들을 동역자로 여기고, 다름을 인정하고 협력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자신이 맡은 일을 충성스럽게 하면서 동시에 다른 지체들을 돌아보아
몸 된 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데 앞장서는 동역자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