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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3년 10월 24일 목요일 - '전도는 방법이 아니다'

v.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v.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v.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v.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v.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2장1-5절
 
'전도는 방법이 아니다'
 
오늘 QT 본문은 고린도전서 2:1-9절 말씀입니다.
1-2절은 복음의 내용에 대한 말씀이고
3-5절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 성령의 능력으로 전함에 대한 말씀이고
6-9절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하여 전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 다시 본질로 돌아갑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무엇을 어떻게 전했는지 말합니다.
 
1. 복음의 내용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전했다고 했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입니다.
이것을 빼고서는 복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자기 주장을 펼 때 철학, 화력한 수사학, 그리고 설득력이 있는 논리를 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오기 전에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당시 세계 최고의 학문과 철학의 도시인 아덴에서였습니다.
거기에는 세계에서 몰려든 지식인들이 많았습니다.
바울도 지식에 있어서 뒤지지 않은 사람인지라 호승심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날마다 거기서 지식인들과 변론을 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이 그들로부터 얻은 별명이 무엇인가?
바로 말장이였습니다. (행 17:18절)
 
물론 바울은 그들이 세워놓고 믿는 신들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복음을 전한 곳 중에서 아덴이 제일 적게 믿었습니다.
그런 실패의 경험이 있기에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전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2. 복음을 전하는 방식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물론 세상적인 지혜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지혜로 설명을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에서 덛는 지혜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지혜로는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힘을 통해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모습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은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이런 방법은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힘을 숭배하는 사람들이기에
이 세상을 구원할 자가 잡혀서 힘없이 십자가에 죽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지처지기 전에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계시가 될 때 믿어지게 되는 것이지 머리로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런 것이 예언의 성취라고 했습니다.
눈으로 본다고 깨닫는 것이 아니고, 귀로 듣는다고 해서 다 이해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사람들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실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승리한 줄 확신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똑똑해도, 하나님께서 눈과 귀와 마음을 열지 않으면 믿지 못합니다.
그러니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3. 복음을 전하는 자세
그러면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
적지 않은 경우, 복음을 전하기 주저하는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자신이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둘째, 자신의 삶이 본이 되지 않아서
셋째, 자신이 전했을 때 실패할까 두려워서.
넷째, 성경적인 지식이 없어서.
 
복음을 전함에 있어 지식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사도 바울의 말 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면 됩니다.
미사여구로, 매끈한 말이 아니더라도 본질을 전하면 됩니다.
그리고 실패 여부는 전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복음을 뿌리면 되고 거두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이 없이 전해야 하는데
그 두려움을 없이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잡히실 때 도망갔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심을 보여주신 다음 바로 나가서 예수님을 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약속한 성령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 성에 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바로 성령을 통해 권능 즉 능력을 덧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발과 관계가 깨지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담대히 복음을 전하려면
성령의 권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를 하기 전에는 반드시 기도를 통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기도를 통해 권능을 덧입습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 성령님께서 앞서 가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킬 것을 기도합니다.
그럴 때 복음을 받아들이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만으로 충분합니다.
성령의 능력 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지혜 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기도함으로 준비 합니다.
 
묵상
복음을 전해 본 적이 있는가?
두려운 것이 무엇이었는가?
전하지 못했거나 지금도 전하지 못하고 있다면 무엇 때문인가?
성경 지식이 없어서 그렇다고 여기는가?
말 주변이 없어서 그렇다고 여기는가?
질문을 할 때 답을 못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가?
자신이 구원에 확신이 없어서 그런가?
체험이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믿음의 사람으로 자신의 삶이 자신이 없어서 그런가?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그런가?
세상 지혜 vs 하나님의 지혜, 세상에 속한 사람 vs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차이를 아는가?
전도는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라면 좀 간단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고 거두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는가?
자신이 전하면 반드시 믿어야 한다고 하는 강박관념에 갇혀 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우선 기도부터 하는가?
성령 충만하면 권능을 얻고 담대하게 나갈 수 있음을 아는가?
먼저 믿은 사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음도 아는가?
평생 먼저 믿은 사람으로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선다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전도가 미련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가?
'삶이 전도'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하는가?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말과 행동이 못해서 조롱거리가 되지는 않는가?
믿는 사람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여겨지는가?

영혼에 대한 거룩한 부담이 있는가? 

 
오늘 하루, 말씀을 묵상하면서, 왜 복음을 전하지 못했는지, 못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복음 전파가 세상 지혜와 말의 매끄러움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의 능력에 있음을 알고 기도하고 능력을 받아
복음의 씨앗을 한 사람에게라도 뿌리는 전도자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