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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양식

2013년 8월 31일 토요일 - '믿음의 공동체의 진정한 지체 의식'

v.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v.16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v.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v.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v.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v.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v.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행할 줄을 아노라.
v.22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
                                                                    빌레몬 (Philemon) 15-22절
 
'믿음의 공동체의 진정한 지체 의식'
 
오늘 QT 본문은 빌레몬 15-25절 말씀입니다.
15-16절은 사도 바울이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말씀이고
17-22절은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의 모든 것을 대신 갚을 것과 순종할 것을 확신한다는 말씀이고
23-25절은 동역자들의 안부와 하나님의 은혜를 축복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가정이 깨어지는 것을 보면서 가슴아파 하는 것처럼
믿음의 가정 공동체인 교회가 갈라지고 깨어지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믿음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되어 가족이 되었지만
그 안에서 사랑과 화해와 용서와 긍휼 보다는
차별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로 인해 하나 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실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앞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도
'아버지와 내가 하나 된 것처럼 저들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였는데
교회와 가정이 보라는 듯이 깨지고 상처를 입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해 하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주인 빌레몬과 종 오네시모를 중재하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주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힘써야 함을 느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날 믿음의 사람들 중에 오네시모와 같은 종을 기꺼이 형제로 받아들이고
그가 빚진 것을 대신 갚아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랑스럽게 형제로 받아들일 것을 적극적으로 권하겠습니까?
오히려 반대의 모습이 더 많은 것은 아닙니까?
 
새로운 사람이 왔을 때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과 외모에 따라 구별하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이익이 될 것 같으면 선심을 쓰고 가까이 하려고 애쓰지만
조금이라도 별 볼일 없을 것 같으면
자신이 그 사람으로 인해 위치가 낮아질 것 같으면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랑이 없고, 끼리끼리 논다는 말을 듣고
말은 잘 하는데 행하는 것은 없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물론 부자지간에도 돈 문제는 깨끗해야 한다고 하지만
바울은 잘못해서 주인에게 손해를 끼친 배상을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런 희생과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이 많을까요?
갚아주면 돌아올 것이, 이익 볼 것이 많다고 생각되면 받지 않는 것처럼 선심을 쓰겠지만
베풀어도 원금도 못 받고 떼일 것 같은 사람에게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 쉽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비록 오세시모의 신분이 낮고 잘못한 것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한 형제요 가족이 되었기에 기꺼이 함께 하겠다고 발 벗고 나섰습니다.
오늘날 바울과 같은 모습이라면 교회 안에서의 반응이 어떻겠습니까?
대단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반대의 사람들이 더 많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교회도 부자 교회로 가난한 교회로 나뉩니다.
사역자들도 부자 교회에 가서 사역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가신 길도 아니요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더라도 바르지 않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대적들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죄인들의 친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아픈 사람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반면 왕족, 귀족, 종교 지도자들, 부자들과는 가까이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쓴 소리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미움을 받으셨고 위기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죄인들의 위한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빌레몬에게 강요하지 않고 간곡히 부탁한다고 하면서 은근히 부담을 줍니다.
네가 사람들에게 평안을 준 것처럼 오네시모를 받아들임으로 나에게도 평안을 주면 좋겠다.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한다.
네가 말한 것 보다 더 행할 줄 안다. (용서하고 받아들인 다음에는 다시 로마로 보내 자신을 도움)
내가 오네시로를 형제로 받은 것처럼 너도 그러하라.
나를 동역자로 여기는 것처럼 그에게도 그러하라.
 
더 나아가 바울은 빌레몬과 그들이 섬기는 교회가 바울을 위해 기도할 것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로 자신이 포로에서 풀려날 것을 확신하면서
그러면 찾아갈터이니 머물 숙소도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사역자를 돕는 것도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결코 아부하는 것도, 과잉충성도,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입니다.
영적으로 받은 은혜에 대한 정성의 보답입니다.
 
묵상
교회 지체들에 대한 관심이 있는가?
지체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고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는가?
교회가 아파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한센병과 당뇨병과 같은 중증에 걸린 것은 아닌가?
교회 안에서 눈에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차별하는 것은 없는가?
자신은 외적으로 별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잘 다가가는 편인가?
새로 오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는가?
지금 가까이 하는 지체들에게 무엇인가 바라기 때문에 가까이 하는 것은 아닌가?
지체들의 필요를 기꺼이 감당하는 편인가?
교회 안에서 늘 자신은 손해보지 않으려고 바둥대는 것은 아닌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동등하게, 형제 자매로 여길 수 있겠는가?
자신이 죽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자신이 '약한 자의 대변인' 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어떨 것 같은가?
지금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보이지 않게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있는가?
선한 일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익명으로 하는 것이 있는가?
믿음의 리더의 가르침에 순종하는가?
믿음의 리더의 필요를 채우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러더를 섬김에 있어서 맹종이니, 과잉충성이니, 아부니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리더를 위해 기도하는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큰 은혜를 잊어버렸기에 차별하는 것은 아닌가?
늘 은혜 충만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은혜의 빚진 자, 사랑의 빚진 자로 어떻게 갚아야 하겠는가?
 
오늘 하루, 한 달을 돌아보고 새 달을 바라보는 첫 주일을 앞두고
지체들을 향한 자신의 시선과 관심이 어떤지를 돌아보고
차별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연약하고 힘든 지체에게로 베품으로
믿음의 공동체를 더욱 든든히 세워가는데 앞장서는, 제자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